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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상규 (댄포스 Application Manager)
이상규 (댄포스 Application Manager)
[투데이에너지 임자성 기자] 지금 대한민국 산업 현장은 분명한 전환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AI 확산으로 데이터센터는 빠르게 늘고 있고, 전력계통은 더 민감해지고 있으 며, 냉난방과 공정열을 다루는 기술은 단순한 설비가 아니라 산업 경쟁력 그 자체가 되고 있다.
정부도 첨단산업 투자 및 데이터센터 확대에 따른 전력수요 급증을 공식적으로 언급했고, 데이터센터 관련 산업 활성화 사업을 통해 친환경· 고효율 장비, 소프트웨어의 개발·실증, 지방분산 기반 조성을 지원하고 있다. 방향만 놓고 보면, 이제 한국도 효율과 전기화, 폐열 활용의 시대로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늘 그 다음이다. 산업의 방향은 미래를 가리키는데, 실제 현장에서 장비를 검토하고 적용하고 승인받는 과정은 여전히 과거의 문법에 붙들려 있다. 현장 엔지니어가 가장 자주 듣는 말은 “기술은 좋은데 국내 적용이 쉽지 않다”는 한마디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 말이 기술 자체를 부정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개는 안전성 자체보다 적용 절차, 재질 입증, 기준 해석, 발주처 승인, 검사 대응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의미다. 한국은 새로운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검증된 기술을 제때 받아들이는 속도에서 자꾸 손해를 보고 있다.
세계 시장은 이미 한발 앞서 움직이고 있다. 유럽연합의 PED(압력장비지침)는 0.5bar를 초과하는 고정식 압력장비의 설계·제조·적합성평가를 다루면서도, 동시에 그 범위에 들어오는 제품의 제한되지만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을 제도 목적 안에 분명히 넣고 있다.
다시 말해 글로벌 스탠다드는 안전성과 시장 접근성을 함께 설계한다. 안전을 확인한 뒤에는그 확인 결과가 시장을 건너갈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제도 속에 들어 있다. 검증은 하되, 중복 검증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길을 열어 두는 것이다.
이 차이는 BPHE, 즉 브레이징 판형열교환기 같은 장비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글로벌 제조사들은 BPHE를 히트펌프, 열회수, 냉동공조, 데이터센터 같은 영역에 쓰이는 대표적인 고효율 열교환기로 제시한다. 공개된 제품 자료만 봐도 AISI 316 계열 판재, 구리·CoResist·스테인리스 브레이징 재질, 최대 40bar 수준의 운전 조건, 그리고 열회수와 MTDC, 즉 데이터센터 응용까지 폭넓게 제시하고 있다. 제조사는 이 기술이 30 년이상 축적된 개발의 결과이며, 높은 열효율을 통해 에너지 절감에 기여한다고 설명한다.
현장 감각으로 풀어 말하면, 이런 장비의 강점은 단순히 “작다”는 데 있지 않다. 같은 기계실 면적 안에서 더 많은 열을 주고받을 수 있고, 설계가 잘 맞으면 압력손실을 줄여 펌프 부담까지 덜수 있다. 데이터센터나 히트펌프처럼 장시간 연속운전이 기본인 시스템에서는 이런 차이가 결국 전력비와 운영비, 배관 구성, 유지관리 방식까지 바꿔 놓는다. 같은 크기에서 더 높은 성능을 내고, 같은 성능을 더 작은 공간에서 달성하는 기술일수록 지금 같은 시대에는 더 빨리 써 봐야 한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자꾸 반대로 간다.
‘재질 검증 중심 구조’가 만든 적용 장벽
한국의 제도는 물론 안전을 가볍게 보지 않는 다. 하지만 수입 압력장비를 다루는 현재의 절차를 보면, 2017년 12월 3일 이후 수입되는 검사대상기기는 국내와 동일한 기준으로 현지 제조검사를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취지는 이해할 수 있어도, 이미 해외에서 적합성 평가를 거친 장비가 한국에 들어오는 순간 다시 국내 기준 틀 안에서 서류와 검사를 맞춰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한 현실이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적합성 평가 뒤에 이동이 이어지는데, 한국에서는 그 다음에 또 하나의 관문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특히 재질 확인 단계에서 국내와 글로벌의 간극은 더 크게 체감된다. 관련 가이드는 재료검사 성적서, 즉 MTR상의 화학성분과 인장강도를 기준으로 동등 이상 재질 여부를 판단하도록 하고 있고, 설계 단계에서 MTR을 제출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비교표로 동등성을 검토하더라도 현장검사일까지는 결국 검사원에게 제출되어야 하며, 요건에 맞지 않으면 해당 단계에서 불합격 처리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BPHE 같은 고효율 장비가 가장 큰 벽을 만난다. 해외에서는 제품의 판재 재질, 브레이징 재질, 압력·온도 조건, 적용 분야, 적합성 자료를 토대로 설계 검토가 이루어지는데, 국내에서는 그 장비가 실제로 얼마나 효율적인가 보다 먼저 그 재질과 구조를 한국식 비교표와 해석 틀에 얼마나 매끄럽게 넣을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된다. 법적으로는 완전히 금지되어 있다 말하 기는 어렵지만, 실무적으로는 “쓸 수 있는 기술” 이 아니라 “끝까지 입증해 낼 수 있는 기술”만 남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결국 익숙한 장비, 익숙한 방식, 익숙한 설계만 반복되기 쉽다.
냉장 애플리케이션에 맞춤형으로 제공되는 댄포스 드라이브 모습 / 댄포스 제공
제도 철학의 차이가 만든 ‘시간 격차’
이 손실은 장비 한 대의 문제가 아니다. 데이터 센터는 앞으로 더 늘어날 수밖에 없고, 정부도 이미 친환경·고효율 장비 실증과 지방분산 기반 조성, 운영 가이드라인 고도화까지 지원하고 있다.
히트펌프 역시 공공시설과 다소비 업종을 중심으로 확대되고, 공기열을 제도적으로 더 넓게 인정 하는 방향의 정비가 검토되고 있다. 한마디로 시장은 커지고 있고 정책도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정작 현장에서는 핵심 장비 적용이 재질 해석과 중복 입증에 가로막힌다면, 우리는 전력 절감의 기회만 놓치는 것이 아니다. 운영 경험을 쌓을 시간, 국산화와 설계 역량을 키울 시간, 다음 프로젝트를 더 잘할 수 있는 학습의 시간을 함께 잃는다.
실제로 적용 시간의 차이는 제도 철학의 차이에서 나온다. 유럽은 적합성평가를 거친 제품이 시장 안에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데 초점을 두지 만, 한국은 수입 시점과 프로젝트 시점마다 다시 설명하고 다시 확인하는 쪽에 더 가깝다. 결국 설계자는 일정 위험을 줄이기 위해 이미 아는 선택 으로 후퇴하고, 그 순간 산업 전체는 더 좋은 효율을 포기한 채 익숙한 비효율을 반복하게 된다.
상호 인정과 선(先)적용
그렇다면 이제는 질문을 바꿀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질문이 “국내 기준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다시 처음부터 입증해야 하는가”였다면, 앞으로의 질문은 “글로벌 스탠다드와 공식 성적서가 있는 경우 국내에서 무엇을 추가로 확인하면 충분한가”가 되어야 한다.
이미 PED 체계에서 설계·제조·적합성평가가 이루어지고, 제조사가 재질과 압력 조건, 적용 범위를 명확히 제시하며, 추적 가능한 성적서와 MTR(재료시험보고서)이 존재한다면, 국내 절차는 그 자료를 전면 부정하는 방향이 아니라 보완적으로 확인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안전을 지키면서도 시간 손실을 줄일 수 있다.
정부의 역할도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첫째, 글로벌 공인 성적서와 적합성 자료가 있는 제품군에 대해서는 제품 한 대 한 대를 다시 설명하게 하기보다 시리즈 단위의 사전 검토나 패스트트랙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둘째, 구조 중심 심사에서 성능 중심 심사로 무게를 옮겨야 한다. 실제 운전 조건에서의 안전성, 압력·온도 신뢰성, 유지관리성, 에너지 절감 효과를 중심에 두고 보되, 재질 확인은 중복 검증이 아니라 상호 인정에 가까운 방식으로 가야 한다.
셋째, 데이터센터와 대형 히트펌프, 폐열 회수 시스템처럼 전력 절감 효과가 큰 분야는 별도의 우선 심사 대상으로 묶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부가 말하는 산업 경쟁력 강화와 전력효율 향상을 현장에서 실현하는 길이다.
무엇보다 산업 규제 샌드박스를 지금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써야 한다. 공식 제도만 보더라도 규제샌드박스는 실증특례, 임시허가, 신속확인을 연계해 운영되고 있고, 규제 유무가 불분명한 경우에는 30일 이내에 확인하도록 되어 있다. 최근에는 특례 유효기간을 최대 6년까지 연장하고, 동일·유사 사업의 심의를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도 손질됐다. 이미 준비는 되어 있다. 문제는 에너지 설비와 산업 장비 영역에서 이 제도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려는 의지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샌드박스가 필요한 이유는 안전은 지키되, 기술의 발전 속도를 제도가 따라갈 수 있도록 완충 장치를 두기 위해서다. 신기술이 시장에 들어와도 아무 데이터 없이 무작정 확산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미 글로벌에서 검증된 기술이라면 국내에서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 더 빨리 실증하고, 더 촘촘히 모니터링하고, 문제가 없으면 더 빠르게 제도화하자는 뜻이다. 정도의 차이겠지만 이 정도의 유연성조차 적용할 수 없다면 한국은 앞으로도 좋은 기술을 “알고는 있지만 늦게 쓰는 나라”에 머물 수밖에 없다.
기술이 아니라 ‘수용 속도’의 문제
대한민국은 기술을 만들 힘도 있고, 운영할 사람도 있고, 시장도 있다. 부족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받아들이는 행정의 속도와 철학일지 모른다. 데이터센터가 늘어나고, 히트펌프가 커지고, 폐열 활용이 본격화되는 지금 같은 시기에는 작은 효율 차이가 곧 국가 경쟁력의 차이로 이어진다.
그런데도 글로벌 스탠다드와 성적서가 존재하는 제품을 국내에 들여오는 데 과도한 시간과 해석의 장벽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스스로 발전의 브레이크를 밟고 있는 셈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글로벌 기준과 공식 성적서가 있는 기술은 더 쉽게, 더 빠르게, 그러나 더 책임 있게 적용할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 산업을 키우고, 전력을 아끼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길이다.
■ 이상규 필자 주요 약력
- KTX·SRT 등 국내외 철도 차량 에어컨 및 제어시 스템 개발
- 이집트·필리핀 등 글로벌 전동차 제어 프로젝트 수행
- 산업용 시험 장비 및 에너지 제어 솔루션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