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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러·배터리 이어 히트펌프도 ‘구독’한다
송고일 : 2026-05-20
보일러·배터리 이어 히트펌프도 ‘구독’한다 / AI 이미지
[투데이에너지 임자성 기자] 보일러 구독, 배터리 구독에 이어 히트펌프를 월정액으로 사용하는 서비스가 국내에서 시도되기 시작했다. 고가 에너지 설비를 직접 구매하지 않고 구독료를 내며 사용하는 방식이 난방 시장으로 확장되는 흐름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유사한 서비스들이 사업화 단계에 들어가 있고, 국내에서도 첫 시도가 나왔다.
에너지 설비 구독의 흐름
구독 방식이 에너지 설비 시장에 처음 적용된 것은 태양광 분야였다. 사업자가 설치비를 부담하고 소비자로부터 장기 구독료를 받는 구조로, 초기 비용이 크고 회수 기간이 긴 설비 시장의 특성에 맞는 모델이었다. 이후 가정용 배터리 저장장치, 보일러로 구독 방식이 확산됐고, 이제 히트펌프로 이어지고 있다.
히트펌프는 투입 전력 대비 3~4배의 열에너지를 생산하는 설비로, 운전 중 온실가스를 직접 배출하지 않는다. 에너지 효율 면에서 가스보일러보다 우위에 있지만, 초기 설치 비용이 가스보일러보다 최대 4배가량 높다는 점이 보급의 걸림돌이었다. 구독 모델은 이 초기 비용 문제를 사업자가 대신 감당하고 소비자로부터 장기 구독료를 받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해외에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유럽에서 히트펌프 구독 서비스가 사업으로 성립하게 된 배경에는 규제가 있다. 유럽연합은 2029년부터 화석연료 보일러의 신규 판매를 사실상 금지하는 규제 타임라인을 명시했다. 보일러를 히트펌프로 교체해야 하는 시장이 제도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 환경에서 장기 구독 계약의 현금 흐름을 자산으로 평가하는 금융 투자가 가능해졌고, 민간 사업자들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엔팔(Enpal)은 태양광·배터리·히트펌프를 결합한 통합 구독 패키지를 운영한다. 소비자는 초기 비용 없이 월 160유로 안팎의 구독료를 20년간 납부하고, 계약 만료 시 1유로를 내면 시스템 소유권을 이전받는다. 엔팔은 글로벌 금융기관으로부터 15억 유로를 조달해 초기 설치비를 충당하고, 장기 구독 계약의 현금 흐름을 기초자산으로 자산유동화증권을 발행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순환시킨다. 독일의 테르몬도(Thermondo)는 월 159유로 수준으로 노후 보일러 무상 철거와 정기 점검을 포함한 히트펌프 임대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정부 보조금과 민간 금융이 결합된 형태가 주를 이룬다. 옥토퍼스 에너지(Octopus Energy)는 정부의 7,500파운드 보조금을 선반영한 뒤 잔액을 최장 10년 할부로 나누는 상품을 운영하고 있으며, 스웨덴 기반의 아이라(Aira)는 영국 시장에 3억 파운드를 투자하며 15년간 실내 온도 유지를 보증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블록파워(BlocPower)가 저소득층 다가구 주택을 대상으로 AI 기반 에너지 분석을 활용한 10~15년 만기 리스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공통적으로 이 서비스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규제가 시장의 방향을 먼저 정해줬기 때문이다. 사업자 입장에서 10년, 20년 뒤에도 히트펌프 수요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고, 그 확신이 대규모 금융 조달로 이어졌다.
국내 첫 시도
국내에서는 2025년 설립된 모닥불에너지가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히트펌프 10년 구독 서비스를 시작했다. 정부 보조금으로 설치비의 70~80%를 선차감하고 잔여 자부담금을 10년 월분납으로 나누는 방식이다. 2025년 12월 전북 익산의 한 주유소에 25kW급 공기열 히트펌프와 축열조를 구축해 첫 상용 서비스를 개시했으며, 해당 사업장은 연간 냉난방비 15% 이상 절감 효과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모닥불에너지의 이창섭 대표는 인터뷰에서 "이번 프로젝트는 히트펌프 보급의 최대 난제인 초기 설치비 장벽을 민간 비즈니스 모델(구독)로 극복해 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라며 "단순히 기기를 일회성으로 판매하고 떠나는 기존 대리점 방식과 달리, 10년간 축적되는 냉난방 에너지 데이터를 바탕으로 실시간 효율을 원격 제어하고 장기 유지 관리를 보장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 대표는 장기적으로 전국의 개별 히트펌프들을 하나의 클라우드 플랫폼으로 묶어 가상발전소(VPP) 및 전력 수요자원(DR) 시장까지 연결하겠다는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했다.
국내에서 자리잡으려면
해외 사례가 보여주듯 히트펌프 구독 서비스가 일회성 시도에 그치지 않고 국내 시장에 안정적으로 안착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함께 갖춰져야 한다.
우선 합리적인 요금 구조다. 히트펌프는 전기를 사용하는 만큼 요금 체계가 최종 경제성을 좌우한다. 이에 대응해 정부와 한국전력은 지난 4월부터 주택용 히트펌프 가동 시 누진제 외의 일반용 요금을 적용하거나 계시별 요금제를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선택형 요금제를 본격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제도가 마련된 만큼, 사용자가 실제 절감 혜택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정교한 에너지 제어 플랫폼과 최적화 솔루션이 꾸준히 결합해야 한다.
둘째는 정책 및 금융의 지속성이다. 지난 3월 '신재생에너지법 시행령' 개정으로 공기열이 재생에너지로 공식 인정받으며 탄탄한 법적 지원 근거가 완비되었고, 정부도 올해 583억 원의 보급 예산을 편성했다. 다만 초기 구독 시장이 보조금 재원에 다소 기대고 있는 만큼, 정책의 흔들림 없는 일관성 유지와 더불어 장기적으로는 민간 주도의 녹색 자산유동화(ABS) 등 자생적인 금융 생태계가 함께 성숙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투명한 계약 안내와 신뢰 형성이다. 히트펌프 기술과 '구독'이라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쌓는 것이 급선무다. 특히 소비자가 유의해야 할 점은, 해외의 난방 구독 사례처럼 이 서비스가 언제든 해지 가능한 단순 렌탈이 아니라 개인 신용에 기반한 장기 금융 계약(Personal Loan) 성격을 띤다는 사실이다. 중도 이사나 폐업 시 잔여 부채 상환 및 승계 책임 등 금융적 리스크를 명확히 고지하는 동시에, 실제 에너지 절감 성과를 수치로 정밀하게 검증해 보일 때 비로소 탄탄한 시장 신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히트펌프 구독은 초기 비용 문제를 우회하는 현실적인 접근법이다. 해외에서는 규제가 시장을 만들고 그 위에서 민간 모델이 자랐다. 국내도 정책 방향은 같은 쪽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새롭게 도입된 요금 제도의 안착과 보조금 정책의 안정성, 소비자 인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 서비스가 시장에 뿌리내리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출처 : 투데이에너지(https://www.todayenergy.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