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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펌프 시대가 온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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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은 전기로 흐른다
게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LG전자의 고효율 히트펌프 라인업. (좌측부터) 멀티브이 아이(Multi Vi), 써마브이 R290 모노블럭, 멀티브이 에스. / LG전자 제공
탄소중립과 에너지 안보, 인공지능(AI)의 발전이 맞물리면서 세계 난방 산업은 가스보일러 중심에서 히트펌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히트펌프는 친환경 대체재를 넘어 차세대 에너지 시스템의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고 있다. 본지는 2회에 걸쳐 2026년 상반기 글로벌 히트펌프 시장의 기술 혁신과 국내 기업들의 대응 전략을 심층 분석한다. 상편에서는 자연냉매와 고효율 기술, AI 기반 에너지 관리 등 글로벌 기술 트렌드를, 하편에서는 국내 기업들의 경쟁력과 향후 시장의 승부처를 살펴본다. / 편집자 주
[투데이에너지 임자성 기자]
이제 보일러실의 가스 불꽃은 꺼지고 있다.
2026년 상반기 글로벌 히트펌프 시장은 단순한 신제품 경쟁을 넘어 난방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는 전환점을 맞았다. 유럽연합(EU)의 F-Gas 규제 강화와 미국 IRA 정책, 에너지 안보 이슈가 맞물리면서 세계 주요 제조사들은 친환경 냉매와 고효율 시스템, 디지털 에너지 관리 기술을 앞세워 시장 재편에 나섰다. 히트펌프는 이제 '가능성'을 입증하는 단계를 넘어 가스보일러를 대체하는 새로운 난방 표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R290의 독주
가장 뚜렷한 변화는 냉매의 세대교체다.
GWP 2088의 R410A는 사실상 퇴출 단계에 들어섰으며, 과도기 대안으로 평가받던 R32(GWP 675) 역시 EU 개정 F-Gas 규정(EU 2024/573)에 따라 2027년부터 소형 주거용 제품에서 사용이 제한되면서 입지가 빠르게 좁아지고 있다.
대신 GWP가 3에 불과한 자연냉매 프로판(R290)이 빠르게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R290 적용 제품 비중은 2021년 3%에서 2024년 말 38%까지 증가했으며, 2026년 상반기 출시된 주요 주거용 히트펌프의 절반 이상이 이를 채택했다. LG전자와 삼성전자, 발리앙트, 캐리어 등 주요 제조사들이 잇달아 R290 기반 제품을 확대하면서 주거용 모노블록 시장은 사실상 R290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다만 모든 시장이 R290으로 통일되는 것은 아니다. 스플릿 시스템은 냉매 누설 시 실내 농도가 폭발 하한선(LFL)에 도달할 수 있는 위험 때문에 적용이 제한된다. 이에 따라 다층 아파트와 상업용 시장에서는 미세 가연성(A2L) 냉매인 R32와 R454B를 사용하는 이원화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 이는 규제 대응이 아니라 냉매 특성과 설치 환경을 고려한 현실적인 기술 선택으로 평가된다.
혹한에서 75도 온수를
히트펌프 경쟁의 핵심은 이제 혹한에서도 안정적으로 고온수를 공급할 수 있는가로 옮겨가고 있다.
주요 제조사들은 영하 25~35℃에서도 난방 성능을 유지하고 70℃ 이상의 고온수를 공급하는 기술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LG전자의 한랭지형 CCHP는 영하 25℃에서도 정격 난방 용량을 유지하고 영하 35℃에서도 안정적인 운전이 가능하다. 발리앙트는 COP 5 수준의 고효율을 구현했으며, 보쉬와 캐리어 역시 영하 35℃ 운전과 최대 75℃ 고온수 공급 기술을 앞세워 기존 가스보일러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특히 75℃급 고온수는 기존 라디에이터를 교체하지 않고도 히트펌프를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유럽의 노후 건물은 대부분 고온 난방을 전제로 설계돼 있어, 기존 설비를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지가 보급 확대의 핵심 변수로 꼽힌다.
이 같은 성능 향상의 배경에는 인버터 가변속 압축기와 지능형 제상 기술의 발전이 있다. 외기 온도와 습도, 증발기 상태를 실시간 분석해 성에 발생 시점을 예측하고 필요한 경우에만 제상을 수행함으로써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한다. 여기에 상변화물질(PCM) 열버퍼를 적용해 제상 중에도 난방이 끊기지 않도록 설계한 제품도 늘고 있다.
설치 장벽을 허물어라
2026년 상반기 신제품들의 또 다른 경쟁 축은 설치 공수의 최소화다.
유럽에서는 배관 숙련 인력 부족이 심화되면서 제품 설계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제조사들은 현장 작업을 줄이고 설치 시간을 단축하는 방향으로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비스만(Viessmann)의 Vitocal 200-A ie는 유압 구성 요소를 실외기에 공장 조립하고, 힌지 방식의 '스위블 컴포넌트 박스'를 적용해 유지보수 편의성을 높였다. LG전자는 열교환기와 주요 배관을 하나의 캐비닛에 통합한 올인원 시스템으로 현장 용접 공정을 최소화했으며, 캐리어 AquaSnap 61AQ는 협소한 출입구도 통과할 수 있는 소형 설계로 시공성을 높였다.
이처럼 설치 시간을 최대 50%까지 줄이는 '인스톨러 프렌들리(Installer Friendly)' 설계는 단순한 편의 기능이 아니라 대리점 확보와 시장 확대를 좌우하는 핵심 경쟁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영국 리버풀 가정에서 경동나비엔 히트펌프를 설치하고 있는 모습 / 경동나비엔 제공
지능형 열관리 시스템
히트펌프는 이제 독립적인 난방기기가 아니라 스마트 그리드와 연결되는 에너지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시간대별 전기요금(TOU)과 기상 데이터를 연계해 전력이 저렴한 시간대에 열을 저장하고, 피크 시간에는 소비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난방 비용을 절감하는 기술이 상용화 단계에 들어섰다. 파나소닉은 에너지 관리 플랫폼 tado°를 적용해 난방 전력 소비를 약 22% 줄였고, 삼성전자 EHS All-in-One은 AI 기반 에너지 모드를 통해 최대 30%의 난방비 절감을 구현했다. SmartThings Pro와 연계하면 단지 단위 에너지까지 통합 관리할 수 있다.
활용 범위는 산업 분야로도 확대되고 있다. 트레인의 Series R RTZA는 AI 데이터센터에서 발생하는 폐열을 최대 99℃의 고온수로 회수해 지역난방 열원으로 활용한다. 주거와 산업, 전력망을 하나로 연결하는 통합 에너지 시스템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마무리
2026년의 히트펌프는 더 이상 가스보일러를 대체하는 개별 제품이 아니다. 친환경 냉매와 고효율 압축기, 지능형 제상 기술, 공장 패키지 설계, AI 기반 에너지 관리가 결합된 차세대 에너지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시장 경쟁의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이제는 단순히 높은 효율(COP)을 구현하는 것을 넘어 안전성, 설치 편의성, 에너지 관리, 운영 경제성을 종합적으로 제공하는 기업이 시장을 선도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변화 속에서 한국 기업들은 어디까지 와 있을까. 이어지는 하편에서는 이 치열한 기술 전쟁 속에서 한국 기업들이 어떤 전략으로 글로벌 주도권을 확보해 나가는지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용어 설명]
EU 2024/573: 유럽연합(EU)이 시행하는 '불소계 온실가스(F-Gas)에 관한 신규 규정'으로, 지구 온난화 지수(GWP)가 높은 냉매의 단계적 퇴출과 2050년 완전 사용 중단이 목표.
모노블록(Monoblock) 시스템: 냉매 회로를 포함한 히트펌프의 모든 주요 부품(압축기, 열교환기 등)이 하나의 실외기 케이스 안에 들어있는 일체형 구조
스플릿(Split) 시스템: 실외기와 실내기가 분리되어 있는 구조
LFL (Lower Flammability Limit, 폭발 하한선): 가연성 가스가 공기 중과 혼합되어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최저 농도
A2L 냉매: 미세 가연성(Mildly Flammable) 냉매로, 기존 고위험 가연성 냉매보다 안전성을 높이면서도 성능을 유지한 분류
제상(Defrost) 알고리즘: 히트펌프 가동 시 증발기에 생기는 성에를 제거하는 기술
힌지 개폐형 '스위블 컴포넌트 박스': 히트펌프 실외기 내부의 제어 기판이나 유압 구성 요소에 접근할 때, 힌지 구조를 활용해 박스를 외부로 돌려 열 수 있게 만든 설계.
PCM (Phase Change Material, 상변화 물질): 특정 온도에서 고체에서 액체(또는 그 반대)로 변하며 열을 흡수하거나 방출하는 물질
TOU (Time of Use, 시간대별 차등 요금제): 전력 수요가 적은 시간대에는 저렴한 요금을, 피크 시간대에는 높은 요금을 적용하는 요금 체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