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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히트펌프, 자생력이 관건이다
히트펌프, 자생력이 관건이다 / AI 이미지
[투데이에너지 임자성 기자] 정부가 그리는 히트펌프 보급의 최종 목표는 단순한 설치 대수가 아니라, 보조금 없이도 시장이 자생적으로 돌아가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이 자생력이 왜 중요한지는 유럽의 최근 사례가 잘 보여준다.
유럽히트펌프협회(EHPA) 집계에 따르면 2024년 유럽 13개국의 히트펌프 판매량은 전년 대비 약 23% 감소했다. 정부 지원 정책 변화로 소비자 신뢰가 약화된 것이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다. 특히 세액공제와 보조금을 축소한 독일과 프랑스는 판매량이 각각 48%, 39% 급감했다. 가스가격 하락과 경기 침체 같은 요인도 영향을 미쳤지만, 보조금이라는 외부 지지대에 의존한 시장은 그 지지대가 흔들리는 순간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한국의 350만 대 보급 로드맵 역시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결국 보조금 없이도 소비자가 선택할 만큼 매력적인 상품을 만드는 과제를 피할 수 없다.
그 승부처는 결국 '공동주택'이다
이 자생력을 확보할 무대로 최근 가장 주목받는 곳이 공동주택이다.
지난 7월 22일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경기 용인의 한 주거성능연구소를 찾아 냉방·난방·온수를 한 대로 해결하는 일체형 히트펌프 실증 현장을 살폈다. 이에 앞서 5월 14일에는 한국지역난방공사와 업계 전문가들이 참석한 간담회를 직접 주재하며 공동주택 적용 방안을 논의했다.
국내 주택의 상당수가 아파트 등 공동주택인 점을 고려하면, 350만 대 보급 목표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공동주택 시장을 빼놓고는 이야기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정부의 초기 보급 전략이 도시가스가 공급되지 않는 지역의 노후 단독주택, 즉 등유·연탄 보일러를 사용하는 에너지 취약계층 지원에 초점을 맞췄던 것과는 분명히 다른 방향이다.
본질은 보일러의 교체
다만 지금 당장은 현실적인 벽이 있다.
히트펌프는 도시가스 보일러와 달리 축열조나 물탱크 같은 추가 설비가 필요한데, 기존 아파트에는 이를 설치할 공간을 새로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정부의 접근도 단계적이다.
김성환 장관은 2030년까지는 신축 주택의 히트펌프 설치를 건축주가 선택하도록 하고, 이후에는 의무화 수준으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을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아직 법령으로 확정된 내용은 아니지만, 신축을 시작으로 선택에서 의무로 확대해 나가겠다는 정책 방향은 분명하다.
정부의 구상은 결국 현재의 '보일러+에어컨' 냉난방 체계를 '히트펌프+에어컨' 체계로 전환하겠다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가격이라는 벽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히트펌프의 표준 설치 비용은 약 1,400만 원으로, 가스보일러(50만~100만 원대)보다 10배 안팎 비싸다. 보조금이 없다면 소비자의 관심을 끌기조차 어렵고, 보조금을 받아 자부담이 수백만 원대로 낮아진다고 해도 투자비 회수기간은 7~8년에 이른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경제적 매력이 크지 않은 셈이다.
결국 지금의 구조로는 앞서 살펴본 유럽처럼 보조금이 있을 때만 팔리는 상품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사계절 가동으로 페이백을 앞당기자
이 매력도를 끌어올릴 현실적인 방법은 히트펌프를 겨울 난방에만 쓰지 않고 여름 냉방까지 활용해 사계절 운전하는 것이다.
회수기간은 초기 투자비를 연간 절감액으로 나눈 값이다. 초기 투자비가 동일하다면 회수기간을 줄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연간 절감액을 늘리는 것이다. 결국 답은 가동 기간을 늘리는 데 있다.
겨울철 난방비 절감 효과에 여름철 냉방비 절감 효과까지 더해지면, 같은 히트펌프 한 대로 절감하는 연간 비용이 커지고 투자비 회수기간도 그만큼 짧아진다. 그 결과 보조금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경제적 경쟁력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결로, 그리고 그 해법
사계절 가동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식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구온난화지수가 낮은 R290 등 친환경 냉매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가연성 냉매의 실내 배관 통과가 제한되는 추세다. 이에 따라 여름철 냉방은 에어컨처럼 실내기를 별도로 설치하는 방식보다 기존 온돌배관에 냉수를 순환시키는 바닥냉방 방식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거론된다.
문제는 국내처럼 고온다습한 기후에서는 결로 위험을 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냉방 성능을 높이기 위해 냉수 온도를 낮추면 바닥 표면 온도가 이슬점 이하로 떨어져 마루에 물방울이 맺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보완할 실마리는 이미 마련돼 있다. 30세대 이상 신축 공동주택은 시간당 0.5회 이상의 환기가 가능하도록 환기설비 설치가 의무화돼 있다. 경동나비엔, 휴마스터 등 국내 냉난방·환기 설비 기업들이 저마다 고효율 습도 제어 기술을 내놓고 있는데, 이 의무 환기설비에 이런 습도 제어 기능을 연계하도록 제도를 개선한다면 새로운 설비를 추가하지 않고도 결로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향후 3년이 자생력을 결정한다
장관의 구상대로 2030년까지 선택제가 유지된다면, 앞으로의 3년은 단순한 유예기간이 아니라 사계절 가동이 가능한 설계 기준을 마련해야 하는 준비 기간이다.
신축 공동주택용 냉난방 일체형 히트펌프의 표준 사양에 습도 제어 기술을 반영하도록 유도하고, 보조금 평가 기준 역시 단순 설치 대수보다 여름철 냉방 활용도 등 실제 가동 성과를 함께 반영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향후 의무화가 추진되더라도 히트펌프가 유럽처럼 보조금에 의존하는 제품이 아니라, 소비자가 스스로 선택하는 경쟁력 있는 냉난방 시스템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결국 관건은 보조금을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 지급하느냐가 아니다. 보조금이 사라진 뒤에도 소비자가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을 만들어 놓느냐가 시장의 지속가능성을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