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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펌프, 나라마다 다른 길을 간다
히트펌프, 나라마다 다른 길을 간다 / 투데이에너지
[투데이에너지 임자성 기자] 히트펌프는 이미 흔한 기술이 됐지만, 잠재력의 일부만 쓰이고 있다. 전 세계 건물 난방 수요의 15%도 채우지 못하며, 산업·지역난방에서는 여전히 니치 기술이다. 그마저도 나라마다 그리는 그림은 전혀 다르다.
세 개의 시장, 세 개의 속도
히트펌프가 쓰이는 영역은 건물·지역난방·산업 세 곳인데, 성숙도는 크게 다르다.
가장 앞선 건 건물 부문이다. 설치 스톡은 미국이 세계 최대이고 중국·유럽·일본이 뒤를 잇지만, 연간 판매량은 중국이 가장 많다.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히트펌프가 가스보일러·화로 판매량을 앞질렀다. 이런 확산이 두드러지는 곳은 대개 기후가 온화한 지역이지만, 냉방 수요가 늘어나는 지역에서도 냉난방을 겸하는 리버서블 제품을 중심으로 확산이 빠르다.
지역난방은 아직 초기 단계다. 전 세계 건물 열수요의 약 10%를 지역난방이 담당하는데, 이마저 90%가 화석연료로 공급된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는 500MW 규모의 히트펌프가 지역난방 수요의 10~20%를 공급하는 등 곳곳에서 구체적 사례가 나오고 있다. 유럽 전체로 보면 대형 히트펌프·전기보일러가 2023년 지역난방의 3%를 차지했는데, 비중은 작지만 모든 열원 중 성장률이 가장 높았다.
산업 부문은 이제 막 발을 뗐다. 높은 초기 투자비, 기술적 복잡성, 전력망 연결 지연, 낮은 인지도가 그동안 확산을 가로막았다. 일본의 산업용 히트펌프 용량은 2024년 약 650MW로 10년 전(290MW)의 두 배를 넘었지만, 전체 산업 열수요 대비 비중은 여전히 미미하다. 다만 기술 진전은 빠르다. 120°C를 넘는 제품이 2022년 상용화됐고, 160°C급도 2027년 출시가 예정돼 경공업과 제지·화학 부문의 잠재력을 키우고 있다.
건물 부문을 중심으로, 국제에너지기구(IEA)가 「히트펌프 모니터 2026」에서 제시한 세 가지 정책 시나리오를 놓고 보면 2035년까지의 격차가 뚜렷해진다. 현재 정책만 유지되면(CPS) 판매량은 80% 넘게 늘어난다. 각국이 이미 공표한 정책까지 반영하면(STEPS) 판매량이 두 배 이상 늘고, 히트펌프가 전 세계 난방 수요의 약 20%를 담당하게 된다. 탄소중립 경로(NZE)에서는 최근 10년보다 두 배 빠른 속도로 시장이 성장한다.
부문별 성숙도가 다른 만큼 국가별 확산 경로도 다르다. 세계 시장을 움직이는 중국·유럽·미국·일본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히트펌프 시장을 키우고 있다.
제조가 만든 시장, 중국
중국은 판매량 기준 세계 최대 시장이다. 전 세계 히트펌프 생산능력의 35%가 중국에 있고, 이는 미국(25%)과 유럽연합(20%)을 합친 것보다 크다. 이 압도적 지위는 사실 하나의 배경에서 나온다. 중국은 히트펌프를 새로 개발한 게 아니라, 이미 세계 최대였던 에어컨 제조 기반을 난방으로 재해석했다. 그 결과 생산비 기준으로 공기-공기 히트펌프는 일본산보다 약 40% 저렴하고, 특허 역시 2022년 기준 전 세계의 3분의 1이 중국에서 나왔다.
이 압도적 생산능력은 국내에서는 지역마다 다른 방식으로 쓰인다. 시장 내부는 지역난방이 지배적인 북부, 냉난방 겸용 기기가 빠르게 퍼진 중남부, 석탄에서 전기로 전환 중인 농촌까지 세 갈래로 나뉜다. 공간난방 수요 중 히트펌프 비중은 아직 한 자릿수지만, 2035년에는 시나리오에 따라 15~20% 수준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이 제조 기반의 힘은 국경 밖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중국 세관 통계에 따르면, 올해 초 중동 정세가 악화하며 유럽 천연가스 기준가격이 한 달 새 40% 넘게 뛰자 중국의 히트펌프 수출은 2026년 1~2월 전년 대비 50% 넘게 늘었고 2월 한 달만 81.8% 급증했다. 정작 같은 기간 중국 내수 생산은 오히려 주춤했지만, 유럽向 수출이 이를 상쇄하며 전체 생산을 다시 밀어올렸다. 위기가 어디서 터지든, 그 수요를 가장 빠르게 받아낼 준비가 된 쪽은 결국 이미 규모의 경제를 갖춘 제조기지라는 뜻이다.
정책이 흔드는 시장, 유럽
유럽은 전 세계 판매량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큰 시장이지만, 최근 흐름은 롤러코스터에 가깝다. 2022년 에너지위기로 촉발된 정책 지원과 20억 달러가 넘는 제조 투자 발표가 맞물리며 두 자릿수 성장을 기록했지만, 2023년 보조금 제도가 조정되면서 뚜렷하게 꺾였고 2024년에도 영국·아일랜드를 제외하면 판매가 줄었다. 다만 2025년 들어서는 독일·스웨덴을 중심으로 다시 반등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유럽 시장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정책이다. REPowerEU를 필두로 건물·산업 전반의 전동화를 밀어붙이는 정책 패키지가 동시에 작동하며, 이 흐름이 이어지면 유럽의 히트펌프 스톡은 2035년까지 CPS에서는 거의 두 배, STEPS에서는 현재의 2.5배로 늘어날 전망이다.
정부가 이렇게까지 정책에 힘을 싣는 이유는 결국 가스 수입 절감이라는 실익 때문이다. 2024년 유럽에 이미 설치된 히트펌프가 없었다면 건물 난방용 가스 수요는 지금보다 12%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20bcm(200억 세제곱미터) 규모다. 유럽히트펌프협회(EHPA)가 올해 발표한 2025년 시장보고서 역시 비슷한 흐름을 짚었다. 지난해 새로 팔린 히트펌프만으로 연간 25억㎥의 LNG 수입을 대체하는 효과가 났다는 것이다. 각국이 공표한 정책이 이어지면 2035년까지 추가로 27bcm을, REPowerEU와 영국의 목표가 그대로 지속된다는 가속 시나리오에서는 최대 39bcm까지 절감 여지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다만 이는 정책 목표가 지속된다는 전제하의 시나리오이며, 실제 이행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교체주기가 미는 시장, 미국
세 지역 중 가장 이질적인 곳은 미국이다. 이미 1990년에 640만 가구(전체의 7%)와 45만 개 상업 건물(10%)이 히트펌프로 난방을 했을 만큼 오래된 시장이고, 2025년 기준 히트펌프 판매량은 이미 가스 화로 판매량을 앞질렀다. 같은 해 기준 20%가 넘는 미국 가구가 히트펌프를 주 난방기기로 쓴다.
이 시장을 지탱하는 힘은 유럽처럼 정책 하나가 아니다. 여러 구조적 동력이 겹쳐 있다. 전기요금이 낮거나 겨울이 온화한 지역의 유리한 생애비용, 연방·주·유틸리티 차원의 인센티브, 그리고 무엇보다 기존 에어컨의 자연스러운 교체 주기다. 미국 가구의 90% 이상이 에어컨을 갖고 있고 이 중 75%는 냉방 전용 중앙 에어컨인데, 교체 시점에 냉난방 겸용 리버서블 제품으로 바꾸는 데 드는 추가 비용은 200~500달러에 불과하다. 이 교체 주기만 따라가도 2035년까지 미국 가구의 약 60%가 히트펌프 난방을 갖추게 될 잠재력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정책 개입 없이도 시장 스스로 굴러가는 구조라는 뜻이다.
기술이 앞서는 시장, 일본
일본은 세계 판매량의 약 7%를 차지하는 성숙 시장이지만, 최근 몇 년간 사실상 정체돼 있다. 시장을 지배하는 건 리버서블 에어컨으로, 가구당 평균 2.8대라는 세계 최고 보유율을 기록한다. 소형 표준화 제품은 점점 중국에서 수입되는 반면, 대형 시스템과 온수기는 여전히 자국에서 생산된다. CPS 시나리오에서는 2035년까지 시장 성장이 사실상 없고, STEPS에서도 온수기 판매가 두 배로 느는 정도의 완만한 성장에 그친다.
일본이 승부를 보는 곳은 시장 규모가 아니라 기술이다. 압축기·냉매·시스템 통합 기술에서 강점을 지키고 있고, 2001년 개발된 CO2 냉매 온수 히트펌프 '에코큐트'는 출시 10년 만에 온수 시장의 10%를 차지하며 세계적인 기술 벤치마크가 됐다. 시장을 키우는 대신 이런 기술을 다른 나라 제조사들이 기준으로 삼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일본이 택한 승부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
네 지역을 나란히 놓고 보면, 시장이 커지는 경로가 서로 다르다. 중국은 이미 존재하던 제조업 역량이 시장을 만들었다. 유럽은 정책이 시장의 등락을 그대로 좌우한다. 미국은 교체 주기라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정책 없이도 시장을 키운다. 일본은 시장 규모 대신 기술 표준으로 존재감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이 차이를 가르는 건 결국 '무엇이 확산의 병목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저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중국은 병목이 애초에 없었다. 유럽은 초기비용·설치비라는 병목을 정책이 직접 메워야 했고, 그 정책이 흔들릴 때마다 시장도 함께 흔들렸다. 미국은 병목의 형태 자체가 달랐다. 냉방 인프라는 이미 갖춰져 있었으니, 남은 건 그것을 난방까지 확장하는 결정뿐이었다. 일본은 병목이 아니라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쪽에 가깝다. 정책은 이 병목을 조정하는 도구일 뿐, 시장을 처음부터 만들어내는 마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 네 가지 모델 가운데 어디에 가까울까. 중국처럼 제조 경쟁력을 앞세울지, 유럽처럼 정책으로 초기 시장을 밀어붙일지, 미국처럼 기존 냉방 인프라의 교체 수요를 활용할지, 일본처럼 기술 표준으로 승부할지 — 답은 아직 열려 있다. 다만 분명한 건, 같은 기술이라도 어떤 산업 기반과 전략을 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시장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용어설명]
CPS / STEPS / NZE : 각각 현행정책 시나리오, 공표정책 시나리오, 넷제로 시나리오를 뜻하는 IEA의 3대 전망 체계.
설치 스톡 (installed stock) / 판매량 (sales) : 스톡은 특정 시점까지 누적된 설치 대수, 판매량은 그해 새로 팔린 대수를 뜻한다.
bcm (billion cubic meters, 십억 세제곱미터) : 천연가스의 부피를 나타내는 단위로, 국가 단위 가스 수급 규모를 비교할 때 쓰인다.
넷제로산업법 (Net-Zero Industry Act, NZIA) : 유럽연합이 탄소중립 핵심 기술의 역내 제조 역량과 공급망을 강화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
에코큐트 (Eco Cute) : 일본이 2001년 개발한 CO2 냉매 기반 히트펌프 온수기의 시장 명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