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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전기, ‘언제’ 쓰느냐가 중요하다
하지원 사단법인 에코나우 대표
[투데이에너지] 전기는 독특한 상품이다. 필요할 때 부족하면 안 된다. 일반 상품처럼 수요가 몰린다고 창고에서 꺼내 쓸 수도 없다. 그래서 전력시스템은 평소 얼마나 쓰느냐보다 가장 많이 쓰는 순간, 즉 최대전력(피크)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발전설비와 송·변전망은 최대수요에 여유분까지 고려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피크는 비싸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피크가 심상치 않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한국에서 지난 10년간 최대전력의 증가 속도가 평균 전력수요 증가 속도보다 6배나 빨랐다고 분석했다. 앞으로는 더 걱정스럽다. 기후변화로 폭염과 냉방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여기에 AI와 데이터센터, 반도체가 있다. 전기차와 산업의 전기화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AI가 가져올 변화는 크다. IEA는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소비가 2024년 약 415TWh에서 2030년 945TWh로 두 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우리는 분명 더 많은 전기를 필요로 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AI와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은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다. 무탄소 전원을 늘리고 전력망과 저장장치를 확충하는 것도 시급하다.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전기가 부족한 것인가, 특정 시간에 너무 많은 전기를 한꺼번에 쓰는 것인가.
피크전력 1GW를 낮추는 것은 단순히 전기 1GW를 덜 쓰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전력설비는 최대전력에 예비율까지 고려해 준비하기 때문에 피크를 낮추면 발전설비뿐 아니라 송·변전망에 필요한 투자 부담까지 함께 줄일 수 있다. 그래서 이제 에너지정책에는 공급 확대와 함께 ‘수요 유연성’이라는 또 하나의 축이 필요하다. 전기를 얼마나 쓰느냐보다, 언제 쓰느냐가 중요해진 것이다.
흥미롭게도 AI 시대의 대표적인 전력 다소비 시설인 데이터센터에서 이미 이런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구글은 데이터센터의 모든 연산을 반드시 같은 시간에 처리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시 처리해야 하는 작업은 그대로 하되 일부 비긴급 연산은 전력망에 여유가 있는 시간으로 옮긴다. 2026년 미국 전력회사들과 계약한 구글 데이터센터의 수요반응 용량은 1GW에 이르렀다. 전기를 안 쓴 것이 아니다. 전기가 가장 필요한 시간을 피해 쓴 것이다.
이렇게 보면 수요는 더 이상 주어진 숫자가 아니다.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 자원이다. IEA가 최근 수요 유연성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력 사용시간과 양을 시스템 상황에 맞게 조절하면 피크를 낮추고 신규 투자를 줄이거나 늦출 수 있다. 그러나 기술만으로 피크를 움직일 수는 없다. 기업이 조업시간이나 설비운전을 조정하고, 데이터센터가 연산시간을 바꾸고, 소비자가 전기차 충전시간을 옮기려면 움직일 이유가 있어야 한다. 전력요금과 시장제도가 명확한 가격 신호를 보내야 하고, 수요를 조절한 기업과 소비자에게는 그 가치만큼 보상해야 한다. 그래야 수요관리가 캠페인을 넘어 발전소·ESS·전력망과 함께 실제 전력자원으로 기능할 수 있다.
최근 에코나우가 전국 초·중·고 학생 4954명과 진행한 에너지행동 공모전에서도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단순히 ‘전기를 아끼자’고 가르치지 않고 에너지가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먼저 이해하도록 했더니 60.5%가 “적은 비용만 내고 있어서 편리함에 익숙해진 채 쉽게 쓰고 낭비하고 있었다”는 데 공감했다. 아이들의 답은 어쩌면 우리 에너지정책에도 질문을 던진다.
이제 전력계획의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최대전력이 어디까지 올라갈 것인가’를 예측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최대전력을 얼마나 움직일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전기의 시대에서 전기를 가장 필요한 곳에, 가장 현명한 시간에 쓰는 능력. 그것이 발전소 하나를 더 짓는 것만큼 중요한 새로운 에너지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