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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논단] 생산적 금융의 비생산성

에너지신문
2026-09-18
▲ 양춘승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
▲ 양춘승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

[에너지신문] 정부가 ‘생산적 금융’을 경제정책의 핵심 구호로 내걸고 대대적인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부동산 PF와 가계대출에 묶인 채 지대추구에 안주해 온 금융자원을 첨단 전략산업과 혁신기업, 지역 생태계로 돌리겠다는 취지다.

5년간 150조원을 공급하는 ‘국민성장펀드’가 그 선봉에 서 있다.

금융이 집값을 끌어올리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실물경제의 미래 성장동력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지극히 타당하다.

그러나 이 정책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서 곧바로 모순을 드러냈다. 정부는 국민성장펀드의 첫 메가프로젝트 우선 검토 대상으로 약 3조 3000억원 규모의 ‘반도체클러스터 에너지인프라’ 사업을 올렸다.

한국중부발전과 SK이노베이션 E&S가 추진하는 1050MW급 액화천연가스(LNG) 열병합발전소로, SK하이닉스 공장에 전력과 증기를 공급하는 시설이다.

첨단 반도체 경쟁력을 위해 안정적인 전력과 열원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은 현실적 근거가 있다. 하지만 그 필요성이 곧 ‘새 화석연료 발전소 건설’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선택지를 치열하게 비교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의 출발점이다. 전력망 보강, 재생에너지 직접구매계약(PPA), 에너지저장장치(ESS), 수요반응(DR), 전기보일러와 무탄소 열원의 조합 등 다양한 탈탄소 해법을 먼저 진지하게 검토했는지 공개된 자료로는 알 수 없다.

다각도의 대안 검토를 건너뛴 채 익숙하고 손쉬운 가스발전부터 공적 금융지원 테이블에 올리는 것은 에너지 안보가 아니라 낡은 기술에 기댄 무책임한 ‘경로 의존’이다.

더구나 2030년에 새 대형 화석연료 설비의 장부를 여는 것은 정책 스스로 ‘좌초자산(Stranded Assets)’ 위험을 양산하는 자기모순적 선택이다.

한국이 2050년 탄소중립을 법정 목표로 천명한 상황에서, 최소 30년 이상 가동해야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가스발전소는 필연적으로 정책적 딜레마에 부딪힌다.

감축목표에 맞춰 일찍 가동을 멈추면 국민성장펀드와 금융권이 막대한 손실을 떠안고, 끝까지 돌리면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와 정면 충돌한다.

글로벌 빅테크 고객사들이 공급망 전반에 RE100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LNG 전력은 RE100 이행 수단도 될 수 없다. 당장의 생산비 절감을 내세운 정책금융이 장래의 탄소비용과 전환비용을 키워 수출 경쟁력을 갉아먹는 역설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현재의 금융 구조는 더 깊은 불공정성을 드러낸다. 확실한 대기업 수요처가 확보된 상업 인프라 사업에 정책기금이 후순위 대출과 지분투자로 들어가 손실 위험을 먼저 떠안고, 민간 금융사는 안전한 선순위에 안착하도록 판을 짜고 있다.

미개척 혁신 분야도 아닌 기성 화석연료 설비의 하방 위험을 왜 국민의 기금이 대신 져야 하는가?

국민참여형 펀드 역시 재정의 20% 우선 손실 부담이라는 파격적인 안전판을 깔아주면서도, 정작 상방 이익에 대한 공공 환수(Profit Sharing)나 성과 미달 시 회수(Clawback) 같은 통제 장치는 빠져 있다.

결국 '위험은 국민이 부담하고 성과는 개인이 독차지하는 불공정한 특혜를 구조화하고 있다.

생산적 금융의 본령은 전략산업이라는 간판을 단 곳에 자금을 양적으로 쏟아붓는 데 있지 않다. 시장이 감당하기 어려운 장기 혁신의 불확실성을 공공이 나눠 사회 전체의 생산능력과 회복력을 질적으로 높이는 데 있다.

이미 자체 조달 능력이 충분한 대기업의 일상적 설비나 안정된 화석연료 인프라에 공적 자금을 덧대는 것은 생산적 금융의 ‘추가성(Additionality)’ 요건을 근본부터 부정하는 일이다.

반도체는 대한민국의 핵심 미래 산업이지만, 그 공장 옆에 설 새 가스발전소까지 미래 인프라가 될 수는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150조원을 얼마나 빨리 소진하느냐가 아니라, 그 자금으로 어떤 에너지와 산업 생태계를 남길 것인가에 대한 원칙이다.

생산적 금융이 화석연료의 수명을 값싸게 연장하고 좌초자산을 양산하는 순간, 그 금융은 스스로 가장 뼈아픈 ‘비생산성’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출처 : 에너지신문(https://www.energ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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