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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제조업 물량 공세, 신흥국 시장 잠식…韓 주력산업 대응 시급”

▲ 연간 미국 상품무역수지 적자 대상 주요국 비중 추이(1989~2025년)(단위: 십억 달러, 자료:U.S. Census Bureau, U.S. Trade in Goods by Country)
미국의 관세 장벽으로 중국의 대미 수출이 위축된 가운데, 중국산 제품의 물량 공세가 신흥국과 유럽으로 확산하며 한국 주력산업의 수출시장을 위협하고 있다. 이에 첨단 반도체 제조 역량을 지키고 전략산업 투자를 확대하는 한편, 신흥국 현지화를 통해 수출시장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산업연구원(KIET·원장 권남훈)이 지난 8일 발표한 ‘국제무역구조 변화 동향과 한국 산업의 대응 방향’(경희권·이준·김상훈)은 미국의 관세 정책 이후 나타난 국제무역의 ‘거대한 재배치(Great Reallocation)’와 중국 제조업의 해외시장 잠식을 분석하고, 이를 ‘China Redwave’로 규정했다. 보고서는 AI 반도체 특수에 가려진 국내 주력산업의 경쟁력 약화를 지적하며 첨단 반도체 역량 유지, 산업 비용 경쟁력 강화, 신흥국 현지화 투자 확대를 대응 방향으로 제시했다.
미국의 상품무역수지 적자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6년 45%에서 최근 15% 수준으로 낮아졌다. 미국 전체 상품 수입 중 중국산 비중도 같은 기간 25%에서 10% 이하로 하락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수입 수요 감소보다 교역 상대국이 재편되는 흐름과 맞물려 있다.
전미경제연구소(NBER)에 따르면 2017∼2024년 미국의 대중국 수입액은 655억 달러 감소한 반면, 대멕시코 수입은 1,926억 달러, 대베트남 수입은 872억 달러, 대만은 738억 달러, 한국은 600억 달러 증가했다. 중국의 대미 수출 감소분을 다른 국가들이 흡수하는 동시에 미국의 수입 수요도 확대된 것이다.
품목별로 베트남은 라우터·통신장비·노트북·SSD 등 전자제품 제조서비스(EMS), 멕시코는 서버·자동차, 대만은 서버·비메모리 반도체를 중심으로 미국 시장에서 입지를 넓혔다. 한국의 고대역폭메모리(HBM) 상당량도 대만을 거쳐 서버 형태로 수출돼 미국 수입 통계에서 한국산 반도체의 기여도가 실제보다 낮게 집계될 수 있다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경희권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미국의 무역적자 확대에 통상정책뿐 아니라 AI 패권 선점을 위한 수요 급증, 즉 ‘AI Trade’가 크게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이준 산업연구원 전략산업연구센터장은 지난 20년간 지속된 중국 제조업의 고도화가 한국 주력산업의 경쟁우위를 위협하는 핵심 대외 변수라며 국내 산업의 K자형 양극화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진단했다.
미국 시장 접근이 어려워진 중국 제조업의 수출 물량은 아세안·중동·중남미·아프리카 등 비서방권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는 연방준비제도 이코노미스트 노트(2026년 5월)와 브루킹스연구소(2026년 9월) 등이 언급한 ‘차이나 쇼크 2.0(China Shock 2.0)’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 중국 수출 대상 주요 국가·권역별 비중 추이(2015~2024년)(단위: %)
UN Comtrade 통관 통계를 바탕으로 신흥국의 산업별 수입 구성을 분석한 결과, 중국산 비중은 배터리 분야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베트남 약 80%, 인도 86%, 필리핀 71%에 달했다. 가전은 말레이시아 77%, 태국 76%, 인도네시아와 브라질 각각 75%를 기록했다.
자동차는 인도네시아 42%, 태국과 말레이시아 각각 41%였으며, 기계류는 인도네시아 60%, 태국 52%, 베트남 45%로 나타났다. 반면 한국산 제품의 점유율은 대부분의 신흥국에서 4% 이하에 머물렀다.
한국이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한 분야도 있었다. 조선은 안보 장벽, 멕시코는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의 원산지 규정, 인도는 수입대체 정책이 중국산 제품의 시장 진입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조선 분야의 수입 대상국 비중은 베트남 32%, 필리핀 44%, 인도 10%로 집계됐다. 가격 경쟁력뿐 아니라 안보와 통상규범, 현지 산업정책도 시장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분석이다.
중국산 제품의 시장 잠식은 유럽에서도 뚜렷하다. 2015∼2025년 유럽연합(EU)의 대중국 수입액은 3,564억 달러에서 7,248억 달러로 두 배 이상 늘었으며, EU 역외 수입에서 중국산이 차지하는 비중도 18.7%에서 22.7%로 상승했다.
같은 기간 한국산 제품의 EU 수입액도 430억 달러에서 870억 달러로 증가했지만, 증가액은 중국의 약 8분의 1에 그쳤다. 배터리와 태양광 분야의 EU 역외 수입 중 중국산 비중은 각각 약 90%, 98%에 달했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배터리 규정 등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지만, 중국산 제품을 대체할 생산 역량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보고서의 진단이다.
전기차 시장에서는 품목별로 차이가 나타났다. EU의 중국산 배터리전기차(BEV) 수입은 상계관세 시행 이후 소폭 감소한 반면 한국산 수입은 증가했다. 그러나 중국 기업들이 플러그인하이브리드차(PHEV)와 하이브리드차(HEV)로 수출 품목을 전환하면서 해당 차종의 수입은 빠르게 늘었다.
한국은 유럽에서 조선·무기체계 등 안보 관련 분야와 안전·검역 기준, 국가 브랜드가 작용하는 화장품·바이오시밀러 등에서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했다. 다만 글루카곤유사펩타이드-1(GLP-1) 계열 원료·의약품 수입에서도 중국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어 바이오의약품 시장의 한중 경쟁 심화 가능성이 제기됐다.

▲ 주요 신흥 권역별 한중 주력산업군 수입 점유율 변화(2015~2023년)
산업연구원은 중국 제조업의 해외시장 확대에 대응하기 위한 세 가지 전략을 제시했다. 첫째, 첨단 반도체 제조 역량을 유지해야 한다. AI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미국·중국·유럽에서 기존 과점 구도를 흔들 수 있는 신기술이 빠르게 실증 단계에 진입하는 만큼, 향후 시설투자의 분야·위치·시점·규모를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둘째, 산업 비용 경쟁력의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 김상훈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AI와 미래 반도체·바이오·핵공학·우주항공 분야의 경쟁력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대규모 원자력발전소와 입자가속기 증설은 물론 전략산업 보조금과 세제 지원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개별 기업의 가격 경쟁을 넘어 첨단산업 기반 시설과 기술 역량을 함께 확충해야 한다는 취지다.
셋째, 신흥국 현지화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 경희권 연구위원은 반도체 등 고급 중간재의 판로인 최종재 시장 점유율을 유지·확대하려면 신흥국에 과감한 현지화 투자를 추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중국산 제품이 가격과 물량을 앞세워 현지 시장을 선점하는 상황에서 생산·판매·공급망을 현지 시장과 연계해 중간재 수요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준 전략산업연구센터장은 한국이 일본·유럽·아세안과 비교해 제조업 기반의 규모와 역동성을 유지해 왔으며, 미국과 유럽뿐 아니라 주요 신흥국에서도 대중국 견제와 AI 기술혁명 참여 의지가 커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 제품과 현지 합작 파트너에 대한 수요가 확대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이를 활용하는 공세적인 산업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