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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기고] 장주기 에너지 저장 현실적 해법 ‘카르노배터리’
송고일 : 2026-01-02
조준현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
[투데이에너지] 탄소중립을 향한 에너지 전환의 속도가 한층 빨라지고 있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최근 재생에너지를 100GW로 확대하겠다는 정부의 방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태양광과 풍력을 중심으로 한 재생에너지 확대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지만 출력 변동성이 큰 재생에너지가 전력계통의 주력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대규모 에너지저장 수단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현재 국내에서 대용량·장주기 에너지저장 수단으로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술은 양수발전이 사실상 유일하다. 리튬이온 배터리 기반 ESS는 단주기·중주기 저장에는 효과적이지만 수 시간 이상 장주기 저장에는 비용·안전성·자원 측면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2038년까지 20GW 이상의 장주기 에너지저장이 필요하다고 전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수발전 외에 마땅한 기술 대안이 부재한 것이 국내 전력 시스템의 구조적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편 마이크로소프트와 OpenAI를 비롯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재생에너지 기반 전력 공급과 AI 데이터센터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열에너지저장(Thermal Energy Storage) 기술을 핵심 대안으로 주목하고 있으며, 관련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수백 MW 규모의 전력을 상시 소비하는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 환경에서 대용량·장주기 에너지저장 기술 없이는 RE100 달성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탄소중립 정책의 또 다른 축인 석탄화력발전소 폐지도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석탄화력 감축은 온실가스 감축 측면에서 불가피하지만 발전소 폐지와 함께 발생하는 지역 기반 산업의 붕괴, 일자리 감소, 경기 침체 문제는 간과할 수 없는 사회적 비용이다. 발전소 부지와 설비가 단순히 철거 대상이 되는 순간, 이는 막대한 좌초자산이자 지역 경제의 부담으로 전환된다.
재생에너지 확대, 장주기 에너지저장 기술 부재, 석탄화력 폐지에 따른 지역사회 문제라는 과제들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해법으로 최근 주목받고 있는 기술이 바로 ‘폐지 석탄화력발전소 활용 카르노배터리’다.
재생 전력을 열로 저장하는 기술
카르노배터리(Carnot Battery)는 잉여 전력을 열에너지로 변환해 저장한 뒤 필요할 때 다시 전력으로 전환하는 비(非) 전지식 장주기 에너지저장 기술이다. 이상적인 열역학 사이클인 카르노 사이클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국제에너지기구(IEA)에서도 공식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카르노배터리는 수백 MW급 대용량 설계가 가능하고, 저장 시간도 수 시간에서 수십 시간 이상으로 확장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저장 매체가 열이기 때문에 소재 제약이 적고 화재 위험이 없으며, 균등화 전력저장비용(LCOS, Levelized Cost of Storage)이 양수발전 수준으로 낮아 상용화 시 높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해외는 실증 단계, 한국도 대응 필요
유럽을 중심으로 카르노배터리는 이미 실증 단계에 진입했다. 독일·미국 등에서는 기존 석탄화력발전소를 재생에너지 저장 플랜트로 전환하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며, 지멘스 가메사(Siemens Gamesa), DLR, EPRI 등 글로벌 연구기관과 기업이 고온 열저장 기반 카르노배터리 실증을 수행하고 있다.
IEA는 2020년부터 국제공동연구(Energy Storage Task 36, Task 44)를 통해 카르노배터리를 장주기 에너지저장의 핵심 기술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이 개발 중인 실리카샌드와 알루미늄합금을 이용한 고온 열저장 모듈 기술./에너지연 제공
국립군산대학교가 개발 중인 콘크리트 기반 고온 열저장 기술./에너지연 제공
국내에서는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이 IEA 카르노배터리 국제공동연구 프로그램 한국 대표로 참여하면서 국내에 적합한 카르노배터리 개념 연구를 진행했으며, 실리카샌드와 알루미늄합금을 이용한 Lab-scale 고온 열저장 모듈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한국기계연구원은 300℃급 고온 히트펌프와 열저장을 연계하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국립군산대학교는 콘크리트 기반 고온 열저장 연구를 진행했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기술 실험이 아니라 재생에너지 확대 이후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전력계통 문제에 대한 구조적 해법을 모색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폐지 석탄발전, 에너지 저장 자산으로
카르노배터리가 국내에서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폐지 예정 석탄화력발전소의 활용 가능성 때문이다. 석탄화력발전소는 폐지와 동시에 대규모 좌초자산이 되지만 증기터빈·송배전망·부지·수처리 설비 등의 핵심 인프라는 여전히 활용 가치가 높다. 기존 화석연료 보일러를 재생 전력-열저장-증기 생산 시스템으로 대체해 기존 인프라를 재활용함으로써 저비용 대용량 장주기 에너지저장 설비로 전환할 수 있다. 기존 그레이(Gray) 플랜트를 그린 스토리지(Green Storage)로 전환할 수 있는 기술인 것이다.
폐지 석탄화력발전 활용 카르노배터리 기술개발 과제 개요도./에너지연 제공
이러한 배경에서 2025년 9월 기후에너지환경부 산하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의 지원 아래 ‘폐지 석탄화력발전소 활용 장주기 카르노배터리 기술개발’ 과제가 본격 착수됐다. 총 310억 원(정부 지원금 250억 원) 규모로 48개월간 추진되는 이 연구는 국내 최초이자 세계 최고 수준의 카르노배터리 열저장 핵심 기술 및 시스템 통합 기술개발을 목표로 하며, 비에이치아이,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한국기계연구원, 한국남동발전 등이 함께 참여하는 국가 R&D 사업이다. 해당 과제에서는 10MWhth급 541℃ 증기 생산 열저장 파일럿 실증을 통해 기술적·경제적 타당성을 검증할 계획이다.
세부 1과제는 카르노배터리용 고온 열저장 매체 개발 과제로,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주관), 국립군산대학교, 포스하이텍, 아주대학교, 고려대학교가 참여해 550℃ 이상의 고온 열저장이 가능한 저비용·친환경 콘크리트 레시피 개발, 소재 내구성 검증, 콘크리터-열유체관 계면 연구, 열 성능 향상을 위한 고온 PCM 및 첨가제 레시피 개발을 진행한다.
세부 2과제는 개발된 레시피를 기반으로 전기히터와 증기 생산 전열관이 포함된 형태의 열저장 모듈 개발 과제로, 한국기계연구원(주관), 비에이치아이, 삼현비앤이, 피레타, 국민대학교가 참여해 541℃, 40bar 증기 생산이 가능한 5MWhth급 열저장 모듈 개발을 목표로 한다.
총괄 과제는 개발된 모듈을 연결하는 시스템 실증 및 상용급 플랜트 개념설계를 목표로 하며, 비에이치아이(주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삼현비앤이, 대한전기협회, 카이스트가 참여기관으로, 한국남동발전, 한국동서발전, 삼성물산이 수요기업으로 참여한다. 한국남동발전 삼천포발전본부 5·6호기 부지에 10MWhth급 파일럿 플랜트를 구축해 541℃, 40bar 증기를 6시간 방열하는 것을 검증할 계획이다.
또한 파일럿 플랜트 실험 데이터를 바탕으로 수백MWe급 상용 플랜트 레트로핏 개념설계를 진행해 시스템 사양, 운전 전략, 설계 가이드라인을 수립하고, 경제성 평가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번 기술이 개발되면 화력플랜트를 에너지저장 플랜트로 전환하는 레트로핏 신시장이 열릴 것이며, 이를 운영하는 발전사는 대용량 ESS를 활용하는 VPP(가상발전소) 사업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재생 전력 수용성이 확대될 것이며, 계통 안정화에 필요한 비용도 감축될 것이다. 저장된 열을 직접 산업 공정열로 활용하는 경우 산업단지 탄소중립과 RE100 달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장주기 에너지 저장, 지금이 전환점
카르노배터리는 배터리 ESS나 양수발전을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라 이들과 상호보완적으로 작동하는 장주기 에너지 저장 기술이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단기·중기·장기 저장 기술을 조합한 ESS 믹스 전략이 필수적이며, 카르노배터리는 그중 대용량·장주기 영역을 담당할 수 있는 현실적인 해법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카르노배터리는 정부 기술 로드맵과 에너지 전략에 반영되기 시작했고, 연구·실증 단계에서 본격적인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제 필요한 것은 기술 가능성을 제도와 시장으로 연결하는 정책적 결단이다. 재생에너지 확대의 속도만을 논의할 것이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에너지저장 인프라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 지에 대한 전략적 접근이 요구된다.
카르노배터리는 미래의 불확실한 기술이 아니라 지금 당장 준비해야 할 에너지전환의 핵심 수단이다. 폐지 석탄화력발전소를 새로운 에너지저장 자산으로 전환하는 시도는 탄소중립과 계통 안정, 지역경제를 동시에 고려한 현실적 선택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수립될 제12차·13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폐지 석탄화력발전소 활용 카르노배터리 전환 계획을 반영하고, 현재의 첫 R&D 단계에서 상용화 단계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GW급 실증을 위한 정부 R&D 예산 반영도 필요하다.
출처 : 투데이에너지(https://www.todayenergy.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