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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전환 ‘마지막 퍼즐’, 열(熱)에너지가 움직인다
송고일 : 2026-05-28[에너지신문] 전기차와 재생에너지가 에너지 전환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시대가 지나고 있다.
이제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시선은 그동안 정책의 주변부에 머물렀던 ‘열(熱)에너지’로 향하고 있다. 탄소중립의 진짜 승부처는 전력이 아닌 열에 있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 국내 최종에너지 소비에서 산업 공정과 건물 냉난방 등에 사용되는 열에너지는 전체의 약 48%에 달한다.실제로 국내 최종에너지 소비 현황을 살펴보면 산업 공정과 건물 냉난방 등에 사용되는 열에너지는 전체의 약 48%에 달한다.
철강·석유화학·반도체·식품·시멘트 등 주요 제조업 대부분이 막대한 열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그동안 에너지 정책은 발전과 전력망 중심으로 설계돼 왔다.
이에 전문가들은 “탄소중립의 진짜 승부처는 전기가 아니라 열”이라고 입을 모은다. 재생에너지 확대만으로는 산업 현장의 탄소를 줄이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이제는 ‘열의 탈탄소화’를 국가 전략 차원에서 추진해야 할때라고 강조한다.
특히 인공지능(AI) 확산에 따른 데이터센터 급증, 산업 부문의 탄소 규제 강화, 재생에너지 변동성 확대 등이 맞물리면서 열에너지는 단순한 보조 수단이 아닌 국가 에너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자산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 정책 사각지대 해소할 ‘3대 법안’의 등장
최근 추진되는 정책 변화의 핵심은 열에너지를 전력과 동등한 에너지원으로 제도권 안에 편입시키는 데 있다. 특히 세 가지 법안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열에너지 산업 전환의 토대를 만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첫 번째 축은 ‘열에너지기본법(추진 중)’이다. 업계에서는 이 법을 열에너지 정책의 ‘헌법’으로 부른다.
그동안 국내 에너지 정책은 전력 통계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산업체나 건물에서 자체 소비되는 열은 정확히 집계되지 못했다. 어디에서 얼마만큼의 열이 발생하고 버려지는지 조차 국가 차원의 체계적 관리가 부족했던 셈이다.
열에너지기본법이 제정되면 국가 차원의 ‘열지도(Heat Map)’ 구축과 함께 5년 단위 기본계획 수립이 가능해진다.
또한 데이터센터·소각장·산업단지 등에서 발생하는 미활용 폐열 회수 사업에 대한 지원과 인센티브 제공 근거도 마련된다.
두 번째는 지난해부터 시행된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이다. 이 법은 열에너지를 지역 내에서 생산·소비되는 대표적인 분산형 자원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정 지역을 분산에너지 특화지역으로 지정해 전력과 열을 지역 안에서 직접 거래하거나, 신축 건축물에 열병합발전과 히트펌프 설치를 확대하는 등 지역 중심의 에너지 자립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중앙집중형 발전소와 송전망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도시·산업단지·건물 단위로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구조 전환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세 번째 축은 ‘집단에너지사업법 개정안’이다. 기존 LNG 중심 지역난방 체계를 수소·바이오가스·하수열·히트펌프 등 저탄소 열원 중심으로 전환할 경우 정부 지원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 개정안이 기존 지역난방 사업자들의 체질 개선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 “전기만으로는 부족하다”…열에너지 부상한 이유
열에너지 전환이 주목받는 배경에는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구조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단순히 전기를 친환경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는 탄소중립 달성이 어렵다는 현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유럽은 이미 열에너지 전환을 국가 전략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면서 화석연료 기반 난방 체계의 취약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독일·프랑스·덴마크·스웨덴 등 유럽 주요국은 가스보일러 의존도를 줄이고 히트펌프와 지역난방 중심으로 난방 체계를 빠르게 재편하고 있다.
대표 기술로 꼽히는 히트펌프는 적은 전기로 공기·물·지열 등에 존재하는 열을 끌어와 냉난방에 활용하는 고효율 설비다.
1의 전기로 3~5 이상의 열에너지를 얻을 수 있어 기존 화석연료 기반 난방 대비 탄소 배출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역시 히트펌프를 탄소중립 시대의 핵심 기술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국내 산업계도 시장 선점 경쟁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가전업계는 유럽 시장을 겨냥한 히트펌프 제품 확대에 나서고 있으며, 산업용 냉난방 장비 기업들도 고효율·고온형 제품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AI 데이터센터 확대와 친환경 건물 규제 강화가 맞물리면서 중대형 냉난방 시장에서도 히트펌프 수요가 빠르게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여기에 글로벌 기업들의 RE100 참여 확대 역시 열에너지 시장 성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력 사용을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을 넘어, 산업 공정에 사용하는 열까지 친환경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향후 ‘재생열(Renewable Heat)’ 개념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면서 열에너지 시장이 전력시장 못지않은 새로운 성장축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 국내 최종에너지 소비 현황(왼쪽)과 급성장 중인 유럽 히트펌프 시장.■ AI 시대, 데이터센터 폐열이 돈 된다
AI 확산 역시 열에너지 산업의 새로운 변곡점이 되고 있다. 초대형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을 소비할 뿐 아니라 냉각 과정에서 대규모 폐열을 발생시킨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외부로 버려졌지만, 최근에는 이를 지역난방이나 산업 공정에 재활용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실제 북유럽 일부 국가는 데이터센터 폐열을 도시 난방망과 연결해 수만 가구 난방에 활용하고 있다. 국내 역시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 구축이 늘어나면서 폐열 회수 산업이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소각장과 하수처리장의 미활용 열에너지 역시 주목받는다. 서울 일부 지역에서는 하수열을 활용한 냉난방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으며, 지하철 환기열과 산업단지 폐열을 회수하는 기술 개발도 확대되는 추세다.
법적 기반이 마련되면 그동안 버려지던 열이 새로운 수익원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 전력과 열을 묶는 ‘섹터커플링’ 시대
전문가들은 이들 정책과 기술 변화의 최종 목적지가 결국 ‘섹터커플링(Sector Coupling)’에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전력·열·수소 등 서로 다른 에너지 부문을 연결해 효율을 극대화하는 개념으로, 대표 기술이 ‘P2H(Power to Heat)’다.
예를 들어 태양광 발전량이 급증하는 낮 시간대 남는 전기를 버리지 않고 히트펌프로 열로 전환한 뒤 저장했다가, 밤이나 겨울철 난방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특히 열저장(TES·Thermal Energy Storage)은 배터리 대비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으로 대규모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축열조·용융염 등을 활용하면 장시간 에너지 저장도 가능해 재생에너지 확대 과정에서 핵심 인프라로 주목받고 있다.
업계에서는 향후 전력망 안정화와 재생에너지 확대 과정에서 열저장 기술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 남은 과제…“열시장 제도화 필요”
다만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현재 국내 에너지 가격 체계는 여전히 전기와 가스 중심으로 설계돼 있어 폐열 회수나 열저장 설비 투자에 대한 경제성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한 열 배관 인프라 부족, 지역별 열 수요 데이터 미비, 부처별 정책 분산 등도 한계로 꼽힌다. 업계에서는 폐열 활용 기업에 대한 세제 혜택과 함께 ‘열에너지 화이트 인증서’ 제도 도입 등 시장 기반 인센티브 마련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함선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전력이라는 돛뿐 아니라 열이라는 엔진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이번 법안들이 안착하면 국내 에너지 정책도 비로소 전력과 열이라는 두 축으로 균형 있게 움직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의 에너지 경쟁이 단순한 발전량 확대를 넘어 ‘버려지는 열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회수·저장·활용하느냐’의 경쟁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전기를 생산하는 시대를 넘어 열까지 순환시키는 국가만이 탄소중립과 산업 경쟁력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출처 : 에너지신문(https://www.energy-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