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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매 규제, 두 개의 풍경
냉매 규제, 두 개의 풍경 / AI 이미지
[투데이에너지 임자성 기자] 지구 반대편 두 곳에서, 같은 냉매를 두고 정반대 방향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정부가 냉매 규제를 완화하려다 여러 주 정부의 소송에 부딪혔고, 유럽에서는 산업계가 규제 시행을 늦춰달라 요청했다가 환경단체의 반발을 샀다. 방향은 다르지만, 두 갈등 모두 온실가스를 줄이려는 국제 합의와 산업계의 전환 비용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터져 나왔다.
완화에 맞선 소송전
미국에서는 환경보호청(EPA)이 HFC 냉매의 단계적 감축 규정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여러 주 정부가 소송을 걸고 나섰다. 이 감축 규정은 2020년 제정된 미국혁신제조법(AIM Act)에 근거를 둔다.
EPA가 완화를 시도하는 배경에는 산업계의 비용 부담 호소가 있다. HVAC·자동차 공조 업체들은 저GWP(저온실효과) 냉매로 설비를 재설계·재인증하는 데 예상보다 큰 비용이 든다고 주장해왔고, 저GWP 냉매를 다룰 수 있는 인증 기술자와 공급망도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문제도 제기된다.
그러나 여러 주 정부는 이런 완화 시도에 강하게 반발했다. AIM Act가 의회 차원에서 정한 감축 목표를 행정부가 임의로 후퇴시키는 건 법이 정한 의무를 벗어난 조치라는 논리다. 여기에는 이미 저GWP 전환에 막대한 투자를 마친 기업들의 이해도 걸려 있다. 규제가 흔들리면, 먼저 움직인 기업들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역차별이 생긴다는 것이다. 일부 주는 연방 규제와 별개로 자체 기후 목표를 갖고 있어, 연방 차원의 후퇴가 주 차원의 목표 달성까지 방해한다고 본다.
지연 요청에 맞선 반박
유럽에서는 정반대의 장면이 펼쳐진다.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냉매 규제로 꼽히는 EU의 F-gas 규정을 두고, 스페인 유통업계 단체가 시행 시기를 늦춰달라고 요청했다.
스페인 유통업계가 지연을 요청하는 이유는 현실적인 전환 부담이다. 특히 중소 유통·소매업체는 상업용 냉동·냉장 설비 전체를 저GWP 냉매 기반으로 바꿀 자금이 부족하고, 새 냉매를 다룰 인증 기술자도 지역적으로 부족해 법정 시한까지 전환을 마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최근의 경기 둔화로 마진이 줄어든 상황에서 대규모 설비 투자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호소도 있다.
이에 국제환경조사기구(EIA)는 강하게 반박했다. F-gas 규정은 EU 그린딜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뒷받침하는 핵심 정책이라, 지연은 곧 EU 전체의 기후 목표 달성 지연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HFC가 이산화탄소보다 수백~수천 배 강력한 온실가스라는 점에서, 짧은 지연도 누적 배출량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EIA는 지적한다. EIA는 지연이 아니라 정부의 교육·인증·자금 지원 확대가 해법이라며, 이번 상황을 스페인이 저탄소 냉각 기술에서 앞서나갈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같은 물질을 두고 정반대 갈등이 벌어지는가
두 사례는 방향이 정반대다. 미국에서는 정부가 완화를 시도하다 저항에 부딪혔고, 유럽에서는 산업계가 지연을 요청하다 저항에 부딪혔다. 그런데 이 차이는 우연이 아니라, 두 지역의 정치·산업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생긴다.
미국은 연방과 주 정부의 권한이 나뉘어 있고, 이미 전환 투자를 마친 기업군이 존재하는 구조다. 그래서 정부가 방향을 틀 때, 법적 권한을 다투는 소송전으로 번진다. 반면 EU는 초국가기구가 정한 하나의 규제를 회원국별로 서로 다른 여건의 산업계가 이행해야 하는 구조다. 그래서 준비가 덜 된 쪽에서 먼저 지연을 요청하고, 이를 초국가적 환경단체가 되받아치는 형태로 갈등이 나타난다.
즉 같은 원인—몬트리올 의정서 키갈리 개정안에 따른 국제적 HFC 감축 목표—이 서로 다른 정치·산업 구조를 통과하면서, 겉보기에 정반대인 두 개의 갈등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리고 두 갈등의 밑바닥에는 공통적으로 세 가지 요인이 깔려 있다. 정책과 산업 투자의 속도가 서로 어긋난다는 점, 규제 부담이 기업 규모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는 점, 그리고 정부나 산업계의 결정에 맞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주체(주 정부, 국제 환경단체)가 존재했기에 갈등이 표면화됐다는 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
한국도 이 흐름 밖에 있지 않다. 정부는 흩어진 냉매 관련 규정을 통합하는 (가칭) 냉매관리법 제정을 추진하며 연내 입법을 목표로 하고 있고, 이를 뒷받침할 시범사업이 2027년 초까지 진행돼 그 결과가 올가을 입법 논의에 반영될 예정이다. 미국·EU의 사례가 보여주는 세 가지 갈등 요인—정책과 투자 속도의 불일치, 기업 규모별 체감 비용 격차,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주체의 존재 여부—는 한국의 정치·산업 구조에서는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연내 입법을 준비하는 지금이야말로, 태평양 건너 두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볼 시점이다.
[용어설명]
몬트리올 의정서 키갈리 개정안 (Kigali Amendment) : 2016년 채택된 국제 협약으로, 기존 오존층 보호 협약(몬트리올 의정서)에 HFC 냉매의 단계적 감축 의무를 추가.
AIM Act (미국혁신제조법) : 2020년 미국에서 제정된 법으로, 환경보호청(EPA)에 HFC 냉매의 생산·소비를 단계적으로 줄이는 규정을 만들 권한을 부여.
F-gas 규정 (F-gas Regulation) : EU가 HFC를 포함한 불화가스(F-gas)의 사용을 단계적으로 금지·감축하기 위해 만든 규정.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냉매 규제 중 하나로 평가.
EIA (Environmental Investigation Agency, 국제환경조사기구) : 불법 야생동물 거래, 환경범죄, 기후 정책 등을 감시하는 국제 비영리 환경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