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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히트펌프 발목 잡는 '전기세 폭탄'
유럽 히트펌프 발목 잡는 '전기세 폭탄' / AI 이미지
[투데이에너지 임자성 기자] 유럽연합(EU)이 탈탄소와 에너지안보를 위해 난방·냉방의 전기화를 핵심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지만, 정작 전력에 부과되는 세금과 각종 부과금이 화석연료보다 높아 정책 목표와 시장의 경제적 신호가 엇박자를 내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스페인 냉난방공조기기제조업협회(AFEC)는 최근 발표한 연례 시장보고서 'Spain HVAC Market Report 2025'에서 전기화의 기술적 가능성보다 전기요금 구조와 에너지 평가 기준의 규제적 불일치가 히트펌프 보급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보고서는 2026년 2월 처음 발간됐으며, 8월 개정판에서 관련 정책 변화를 추가로 반영했다.
전기가 가스보다 최대 3배 비싼 이유
AFEC에 따르면 유럽에서는 전기에 부과되는 세금과 준조세 부담이 천연가스보다 구조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이 때문에 최종소비자가 부담하는 전기와 가스의 가격 차이는 지역에 따라 2.5~3배까지 벌어질 수 있다.
전력에는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력망 투자, 각종 에너지정책 추진에 필요한 비용이 폭넓게 반영되는 반면, 가스는 상대적으로 낮은 세율이 적용되고 최근 에너지 위기 과정에서는 세금 인하 등의 지원까지 이뤄졌다는 것이 AFEC의 설명이다.
문제는 이러한 가격 구조가 에너지 효율이 높은 전기화 기술에 오히려 불리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AFEC는 히트펌프가 계절성능계수(SCOP) 기준으로 높은 효율을 확보해 가스보일러보다 적은 에너지로 같은 수준의 열을 공급할 수 있지만, 최종 전력가격에 각종 세금과 부과금이 더해지면 운영비 측면에서 소비자의 전환 유인이 약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깨끗해진 전력, 따라가지 못하는 규제
이 같은 문제는 유럽의 발전믹스가 빠르게 탈탄소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AFEC가 에너지 싱크탱크 엠버(Ember)의 2026년 자료를 인용해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25년 EU 전력 생산에서 풍력과 태양광 발전량은 사상 처음으로 화석연료 발전량을 넘어섰다. 풍력과 태양광은 전체 발전량의 약 30%를 차지한 반면 석탄·석유·가스를 합친 화석연료 발전 비중은 약 29%로 낮아졌다.
전력 자체가 빠르게 저탄소화되고 있음에도 전기를 평가하고 과세하는 제도는 과거의 전력믹스를 전제로 한 기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AFEC의 문제 제기다.
결국 전기화를 통해 탄소배출을 줄이려는 정책과 전기 사용에 상대적으로 높은 비용을 부과하는 규제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낡은 1차에너지환산계수가 히트펌프 발목
AFEC가 특히 문제로 지목한 것은 건축물 에너지성능 평가에 적용되는 1차에너지환산계수(PEF)다.
스페인의 건축기술기준(CTE)과 에너지성능인증체계에서는 전력의 비재생에너지 성분에 1.954, 재생에너지 성분에 0.414의 환산계수를 적용하고 있다. AFEC는 이 같은 값이 과거의 전력믹스를 기반으로 산정돼 현재의 발전구조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실제 전력 생산에서 재생에너지 비중이 빠르게 높아졌음에도 과거의 높은 환산계수가 적용되면서 전력 사용의 규제상 에너지 부담이 실제보다 크게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히트펌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히트펌프가 전력 1kWh를 사용해 3~5kWh 수준의 열에너지를 생산하더라도, 건축물 에너지 평가에서는 높은 PEF가 적용되면서 전기화 설비의 효율성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
AFEC는 이 같은 제도적 불일치가 건축물의 재생에너지 요건 충족을 어렵게 하고, 에너지등급과 간접 탄소배출 평가에서도 전기화 건물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AFEC가 제시한 세 가지 해법
AFEC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스페인 정부에 세 가지 정책 방향을 제안했다.
첫째, 신축 건축물이 향후 탈탄소화하기 어려운 개별 보일러 중심의 구조로 고착되지 않도록 중앙집중식 냉난방 시스템이나 향후 전기화가 쉬운 설계를 우선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둘째, 건물 외피 개선과 냉난방 시스템 교체를 개별 사업으로 분리하기보다 리모델링 과정에서 함께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열 개선만 먼저 진행한 뒤 배관이나 기계실 공간 부족으로 향후 히트펌프 전환이 어려워지는 상황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는 취지다.
셋째, 약 230만채로 추정되는 등유·LPG 사용 건물을 우선적인 개보수 대상으로 지정할 것을 제안했다. 에너지 효율 개선뿐 아니라 대기질 개선과 에너지가격 변동성 대응 차원에서도 이들 건물의 전환 필요성이 크다는 판단이다.
6개월 만에 현실이 된 AFEC의 문제 제기
이번 보고서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AFEC가 제기한 규제 개선 요구가 실제 정책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AFEC는 지난 2월 보고서에서 전력의 변화된 발전믹스를 반영하지 못하는 PEF와 CO₂ 환산계수의 개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후 스페인 생태전환부(MITECO)는 지난 5월 건물에너지인증에 적용되는 PEF와 CO₂ 환산계수를 새로 산정하는 공청안을 발표했다.
새 기준안은 2023~2030년 국가에너지기후계획(NECP)의 전력믹스 전망을 반영하는 '전향적(forward-looking)' 접근법을 채택했다. 과거 발전믹스를 고정적으로 적용하는 대신 향후 전력의 탈탄소화 추세까지 평가에 반영하겠다는 의미다.
이는 AFEC가 요구했던 방향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다만 8월 현재 해당 개정안은 최종 확정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검토 단계에 머물러 있다.
탄소비용 상승은 전기화에 또 다른 기회
AFEC는 전기요금과 에너지평가 기준의 문제를 단순한 기술적 세부사항이 아닌 수백만유로 규모의 건물·설비 투자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문제로 보고 있다.
특히 향후 탄소비용이 본격적으로 반영되면 현재의 가격구조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했다.
EU 탄소국경조정메커니즘(CBAM)이 2026년부터 본격 시행되고, 건물·수송 부문을 대상으로 하는 배출권거래제(ETS2)도 2028년 전면 가동을 앞두고 있는 만큼 화석연료 기반 냉난방 설비의 운영비에 탄소비용이 점차 반영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히트펌프를 비롯한 전기화 기술의 경제성을 높이는 요인이 될 수 있다.
AFEC는 탄소배출 감축과 최종에너지 소비 절감이 정책 목표라면 재정·규제 신호 역시 기술 중립적이고 환경적으로 일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1차에너지 소비가 적고 검증된 배출량이 낮으며 실사용 효율이 높은 기술이 정책적으로도 우선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가 어떤 신호를 시장에 보내느냐에 있다는 얘기다.
히트펌프를 비롯한 전기화 기술은 이미 상용화 단계에 진입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전기화의 속도를 높일 수 있도록 세제와 에너지성능 평가, 건축기준을 하나의 방향으로 정렬하는 것이다.
스페인 냉난방업계가 제기한 문제는 특정 국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력의 탈탄소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과거의 에너지 가격과 발전믹스를 전제로 설계된 세제와 인증제도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탈탄소를 위해 선택해야 할 기술에 오히려 불리한 경제적 신호를 보내는 정책 역설이 반복될 수 있다.
AFEC가 이번 보고서에서 던진 메시지도 여기에 있다. 전기화는 더 이상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과 시장 신호의 정합성 문제라는 것이다.
[용어설명]
PEF(1차에너지환산계수·Primary Energy Factor): 전기 같은 최종에너지를 만드는 데 들어간 1차에너지의 양을 나타내는 계수. 건축물 에너지성능 평가·인증에 쓰이며, 계수가 높을수록 해당 에너지원이 규제상 '비효율적'으로 평가된다.
SCOP(계절성능계수·Seasonal Coefficient of Performance): 냉난방기기가 한 시즌 동안 사용한 전력 대비 만들어낸 열(냉기) 에너지의 비율. 3이면 전기 1을 써서 열 3을 만든다는 뜻으로, 수치가 높을수록 고효율이다.
CBAM(탄소국경조정메커니즘·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EU가 철강·알루미늄 등 탄소배출이 많은 수입품에 역내 탄소가격 수준의 비용을 부과하는 제도. 2026년 1월 전면 시행됐다.
ETS2(배출권거래제·Emissions Trading System 2): 건물 난방과 도로수송 부문 화석연료 공급자에게 탄소가격을 부과하는 EU의 새 배출권거래제. 2028년 전면 가동될 예정이다.
NECP(국가에너지기후계획·National Energy and Climate Plan): EU 회원국이 2030년까지의 에너지·기후 목표와 이행 경로를 담아 EU 집행위에 제출하는 국가별 계획. 스페인은 2023~2030년 계획을 운용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