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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없이 여름 냉방부하 줄인다
전기 없이 여름 냉방부하 줄인다 / AI 이미지
[투데이에너지 임자성 기자] 에너지를 전혀 소비하지 않고도 건물이나 차량의 표면 온도를 낮출 수 있는 '복사냉각(Radiative Cooling)' 도료가 여름철 냉방 전력수요를 줄일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태양광의 90% 이상을 반사해 별도의 전력 투입 없이 표면을 주변 공기보다 더 차갑게 유지하는 특수 도료 기술을 조명했다. 기후변화로 냉방 수요가 가파르게 늘고 있는 가운데, 패시브 쿨링 기술이 전력피크 완화와 온실가스 감축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카드로 떠오르고 있다는 분석이다.
런던 버스 지붕에서 시작된 실험
런던 시내버스의 지붕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빨간색이 아니라 흰색인 경우가 많다. 승객 쾌적성을 높이기 위해 2004년부터 2020년까지 순차적으로 버스 지붕을 흰색으로 도장하는 사업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5년 런던 버스 내 더위 관련 민원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고, 이는 기존 백색도료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에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연구팀은 태양광 반사율을 93%까지 끌어올린 신소재 도료를 개발해 실제 버스 두 대의 지붕에 적용하는 실증을 진행했다. 시중 일반 백색도료의 반사율이 84% 수준인 점을 감안하면 수치상 차이는 크지 않아 보이지만, 이 차이가 '흡수하는 열보다 방출하는 열이 많아지는'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는 핵심 변수라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진행된 실증(아직 동료 심사 전 단계)에서는 신규 도료가 표준 백색도료 대비 표면온도를 최대 8℃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리는 '태양광 반사 + 적외선 방출'
복사냉각 도료의 원리는 가시광선과 적외선을 다르게 다루는 소재 특성에 있다. 태양(표면온도 약 5,500℃)은 파장이 짧은 가시광선 영역으로 에너지를 방출하는 반면, 지상의 물체는 훨씬 긴 파장의 원적외선을 방출한다. 복사냉각 도료는 태양광 파장대는 최대한 반사해 흡수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대기층이 투명하게 열려 있는 약 9마이크로미터(㎛) 파장대로 자체 열을 방출해 이 열이 대기에 흡수되지 않고 곧바로 우주로 빠져나가도록 설계된다.
이 기술은 2014년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팀이 세계 최초로 전력 소비 없이 주변 온도 이하로 스스로 냉각되는 소재를 선보이며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다만 당시에는 은, 산화하프늄 등 고가 소재와 복잡한 진공증착 공정 탓에 상용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다공성 실리카 소재인 '에어로겔'과 범용 폴리머를 결합하는 방식 등이 개발되며 생산단가가 대폭 낮아졌고, 최근에는 일반 프리미엄 페인트와 비슷한 수준의 비용으로 생산이 가능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냉방 전력수요 증가·냉매규제와 맞물려 시장 확대
이 기술이 주목받는 배경에는 가파르게 늘어나는 전 세계 냉방 전력수요가 있다. 전 세계 전력소비에서 공간냉방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 6%에서 2025년 10%까지 상승했다. 여기에 기존 에어컨에 사용되는 냉매가스는 이산화탄소 대비 최대 2,000배에 달하는 지구온난화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실내 열을 실외로 배출하는 작동 방식 때문에 도시 열섬현상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도 지목돼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별도의 전력이나 냉매 없이 작동하는 복사냉각 도료는 냉방 에너지 수요 자체를 줄이는 근본적 해법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건물 지붕은 입사 태양광의 약 90%를 흡수하며 일부 미국 도시에서는 전체 표면적의 5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 지붕에 복사냉각 도료를 적용하는 것만으로도 도시 단위의 전력 소비를 유의미하게 줄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네덜란드 도료업체 악조노벨은 에어로겔 기반 제품을, 홍콩의 아이투쿨(i2Cool)은 크기가 다른 입자를 혼합해 넓은 파장대의 태양광을 차단하는 제품을 각각 상용화했다. 아이투쿨의 경우 축구장 119개 면적에 달하는 85만㎡의 건물 표면에 자사 코팅을 적용해 냉방용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1만4,000톤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싱가포르 난양공과대(NTU) 연구팀은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물을 머금은 뒤 증발시켜 기화열로 냉각하는 시멘트 기반 복사냉각 소재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소재는 표준 복사냉각 코팅 대비 표면온도를 5℃ 추가로 낮추고, 냉방 중인 건물에 적용 시 냉방 에너지를 최대 40%까지 절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원료인 시멘트의 단가가 낮아 기존 복사냉각 도료 대비 생산비용을 30분의 1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는 점도 강점으로 꼽힌다.
국내 시사점
우리나라도 여름철 냉방수요 급증에 따른 전력수급 비상경보가 매년 반복되고 있는 만큼, 무전력으로 냉방부하를 줄이는 복사냉각 도료는 건물·차량 부문의 에너지 절감 대안으로 검토해볼 만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의 그린리모델링 및 건물 부문 탄소중립 정책과 연계해 지붕·옥상 분야에 시범 적용하는 방안, 국내 도료·건자재 기업의 관련 기술 개발 및 사업화 가능성도 함께 논의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