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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진단에서 우주 반도체까지...정읍 방사선 연구, ‘다음 20년’
[에너지신문] 암 진단에 쓰이는 방사성동위원소에서 자동차 경량 부품, 축산 악취 저감 시스템까지. 30일 전북 정읍 JB아우름캠퍼스에서 열린 ‘첨단방사선연구소 창립 2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방사선 기술이 연구실을 벗어나 의료 현장과 산업 공정으로 옮겨간 지난 20년의 성과가 조명됐다. 다음 연구의 방향으로는 이차전지와 반도체, 우주 환경에 대응하는 소재·부품 기술이 제시됐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첨단방사선연구소는 이날 기념행사에서 ‘방사선으로 여는 새로운 미래, 세계를 선도하는 첨단방사선연구소’를 새 비전으로 선포했다. 의료·바이오와 농생명, 소재·환경 분야에서 축적한 연구 역량을 바탕으로 차세대 전략기술 연구를 강화한다는 구상이다.
기념식에는 구혁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1차관 등 정부·지자체 및 국내외 산학연 관계자 200여명이 참석했다. 한국방사선산업학회 20주년 기념 학술대회와 미디어데이, 지역 주민 어울림 소통 아카데미도 부대행사로 마련됐다.
정우식 원자력연구원장은 기념사에서 “지난 20년은 방사선 기술이 연구실을 넘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혁신의 힘임을 증명한 시간”이라며 “미래를 선도할 융복합 연구를 확대해 국민 건강과 안전, 국가 경쟁력에 기여할 세계적 연구거점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하겠다”고 밝혔다.

▲정우식 원자력연구원장이 첨단방사선연구소 창립 20주년 행사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구 성과, 병원 공급·기업 생산으로 이어져
연구소가 제시한 성과의 한 축은 기술사업화다. 국내 제1호 연구소기업인 콜마비앤에이치를 통한 생약조성물 ‘헤모힘’ 상용화와 2015년 연구소기업 최초 코스닥 상장이 대표적이다. 연구소는 잔디 추출물 메이신을 활용하는 바이오메이신 등을 포함해 총 8개의 연구소기업을 설립했다.
사업화 영역도 건강 관련 제품에 머물지 않고, 컨테이너 검색기와 의료용 필러, 라돈 차단 도료, 악취 제거 시스템 등으로 넓어졌다. 연구소가 소개한 국산 컨테이너 검색기는 관세청에 6기가 납품돼 인천·부산·평택·광양항에서 운영되고 있다. 연구 성과가 제품 개발을 거쳐 실제 수요처에 적용된 사례다.
의료 분야에서는 방사성동위원소의 국내 생산과 공급 기반을 확보했다. 사이클로트론을 활용해 지르코늄-89와 구리-64 등 진단용 동위원소를 생산하고, 2018년부터 국내 병원과 연구기관에 공급해왔다. 2022년부터는 미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해외로 공급처를 확대했다.
지르코늄-89는 국내 병원 공급에 이어 남아공의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 연구와 파키스탄 암병원의 종양 진단 등에 활용됐다. 암 진단용 장치 원료인 게르마늄-68도 미국 기업과 중국 연구소에 수출됐다. 동위원소 생산 기술이 국내 연구 지원을 넘어 해외 수요와 연결된 셈이다.
동위원소를 활용한 의약품 연구도 진행됐다. 구리-67을 이용한 폐암 치료 의약품은 세포·동물 실험에서 치료 효과를 검증했으며, 지르코늄-89를 활용한 암 진단 나노의약품과 암세포 사멸 나노물질 연구도 이뤄졌다. 동위원소의 생산·공급 성과와 의약품 개발 연구가 나란히 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전자선, 자동차 공정과 환경 문제에 적용
방사선의 산업적 활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자동차 부품용 탄소섬유강화복합소재다. 연구소는 2022년 자동차 센터필러 보강부품에 적용할 전자선 경화 기술을 개발하고 기업에 이전했다.
연구소에 따르면 이 기술은 기존 열경화 공정과 비교해 경화에 걸리는 시간을 20분의 1 수준으로 줄였다. 개발 부품은 기존 금속 소재 대비 14% 경량화했으며, 신뢰성 평가도 마쳤다. 방사선 기술의 활용 범위가 소재의 물성 개선뿐 아니라 제조 공정의 시간 단축으로 이어진 사례다.
전자선을 활용한 환경 기술은 발전소 배출가스와 축산·산업 악취 처리로 확장됐다. 미세먼지 원인물질 제거를 위한 전자선 기반 융합 시스템은 대전 그린에너지센터 열병합발전소에서 현장 실증을 마쳤고, 2022년 녹색기술 인증을 받았다. 축산 악취 저감 시스템 역시 같은 해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 선정됐다.
농생명 분야에서는 2026년까지 10개 작물, 56개 품종의 방사선 육종 품종 등록을 완료했다. 영상 기반으로 작물의 생육 정보를 분석하는 ICT 육종 플랫폼과 스마트팜도 구축했다. 의료와 제조업뿐 아니라 환경·농업 현안으로 연구 대상이 넓어진 모습이다.
이 같은 연구와 실증을 뒷받침한 것은 정읍에 구축된 시설들이다. 2006년 방사선 조사시설을 시작으로 2009년 사이클로트론, 2012년 방사성동위원소 이용 종합시험평가 시설인 RI-Biomics, 2013년 방사선 육종연구센터가 들어섰다. 이어 2016년 방사선 기기팹과 2018년 전자선실증연구동이 구축되면서 시제품 제작과 가공, 성능시험을 지원하는 기반이 확충됐다.

▲행사 주요 참석자들이 단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다음 연구는 이차전지·반도체·우주로
이날 제시된 미래 계획은 기존 방사선 이용기술을 첨단산업의 소재·부품과 결합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연구소는 방사선 기반 이차전지와 고부가가치 개량신약, 내방사선 반도체 기술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저에너지 전자가속기 국산화 연구도 진행할 계획이다.
연구소는 지난 2022년 누적방사선에 대한 내성을 갖춘 능동소자 칩을 개발했다. 향후에는 우주방사선 환경에 대비한 소재·부품 평가 인프라 구축을 추진한다. 방사선에 견디는 소자를 개발하는 연구에 더해, 소재와 부품의 성능을 평가하는 기반까지 마련한다는 구상이다.
AI를 활용한 방사선 분자 예측·탐색과 방사성동위원소 의약품 활용 연구도 미래 과제로 제시됐다. 기존 연구시설과 동위원소 생산 역량을 새로운 연구 방식 및 의약품 개발에 연결하는 방향이다.
국제협력 역시 연구소의 다음 과제를 뒷받침하는 기반이다. 연구소는 2012년부터 IAEA 국제협력센터로 네 차례 연속 지정됐다. 인수공통감염병 대응을 위한 ‘조디악’과 플라스틱 오염 문제를 다루는 ‘Nutec 플라스틱’ 등에 참여했으며, 2025년에는 식량위기 대응 국제공동연구를 위한 ‘ATOMS4FOOD’ 협력 약정도 체결했다.
이번 기념식에서 제시된 다음 20년의 방향은 방사선 기술의 적용처를 넓히는 데 있다는 평가다. 병원 공급과 제품 상용화, 제조 공정 실증으로 이어진 기존 성과 위에 이차전지·반도체·우주 분야 연구를 더하는 구상으로, 새 비전의 구체적인 성과는 이들 연구가 산업 현장의 수요와 연결되는 과정에서 드러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