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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논단] AI 시대의 숨은 조연, 이차전지가 주목받는 이유
송고일 : 2026-01-07
▲ 김태경 폴리텍대학 광주캠퍼스 에너지재료과 교수.[에너지신문] 인공지능(AI)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며 산업계의 시선은 이제 알고리즘을 넘어 이를 구동할 ‘에너지’로 이동하고 있다.
초거대 언어모델과 생성형 AI는 검색, 제조, 금융, 국방까지 산업의 전 영역을 재편하고 있으며, 그 이면에는 막대한 전력 소비가 전제돼 있다.
이 과정에서 전력은 더 이상 값싼 공공재가 아니라 국가와 기업의 생존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으로 성격이 바뀌고 있다.
일론 머스크가 “미래에는 전력이 화폐와 같은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라고 언급한 이유 역시, AI 시대의 본질이 연산 능력이 아니라 이를 지속적으로 뒷받침할 에너지에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전력이라는 화폐를 찍어내는 ‘조판소’가 원자력이나 천연가스 발전소라면, 이차전지는 이 패권 경쟁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차전지는 AI 시대의 주인공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에너지가 생산돼 서버에 도달하기까지 발생하는 치명적인 ‘병목 현상’을 해결하는 가장 유능한 조연이며,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빈틈을 메우는 전략적 요충지임은 분명하다. 주연은 아니지만, 없으면 무대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존재다.
최근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행보는 이러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스리마일섬 원전 재가동을 검토하고, 아마존과 구글이 소형모듈원자로(SMR) 기업과 대규모 계약을 체결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AI 데이터센터는 하루 24시간, 단 한 순간도 멈춰서는 안 되는 산업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값싼 전력이 아니라 끊김 없는 기저전력이다. 이는 곧 발전 설비 확보 경쟁이 AI 경쟁의 전면에 등장했음을 의미한다.
반면 이차전지 기반의 에너지저장장치(ESS)는 스스로 전기를 생산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차전지를 전력망 보완용 수단이나 틈새 시장에 불과한 기술로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AI 데이터센터가 직면한 전력 문제의 본질을 놓친 것이다. 현재의 전력 위기는 ‘발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전력을 제대로 전달하고 조정하지 못해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는 기존 산업시설과 질적으로 다르다. 최신 GPU 서버는 학습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막대한 전력을 끌어다 쓰며, 전력 수요의 변동성과 밀도가 극단적으로 높다.
이는 노후화된 송전망에 심각한 부담을 주고, 특정 시간대에는 지역 전력망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원자력 발전소가 충분한 전력을 생산하더라도, 이를 실어 나를 ‘도로’인 송전망이 병목을 일으키면 데이터센터는 멈출 수밖에 없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발전량이 아니라, 전력을 얼마나 빠르고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느냐에 있다.
이 지점에서 이차전지는 대규모 송전선 증설 없이도 데이터센터 인근에서 전력 흐름을 미세하게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순간에는 저장된 전기를 즉시 방출해 과부하를 완화하고, 수요가 낮을 때에는 잉여 전력을 저장해 전체 전력망의 안정성을 높인다.
이는 단순한 보조 기능이 아니라, 전력 시스템의 운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역할이다. 이차전지는 새로운 에너지원이 아니라, 생산된 에너지를 ‘제때, 필요한 만큼’ 쓰게 만드는 조정 장치다.
특히 무정전 전원공급장치(UPS) 분야에서 이차전지의 위상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과거 납축전지가 정전 시 몇 분을 버티는 비상용 소모품이었다면, 리튬이온 기반 ESS는 평상시에도 전력망 안정화에 기여하며 수익을 창출하는 운영 자산으로 진화하고 있다.
전력 피크 저감, 주파수 조정, 비상 대응까지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되면서, ESS는 데이터센터의 ‘보험’을 넘어 ‘운영 파트너’가 되고 있다. 엔비디아가 차세대 데이터센터 설계에서 ESS를 필수 요소로 명시한 것도 이러한 변화의 상징이다.
실제 사례는 더욱 분명하다. 가스터빈 발전에 의존하던 일론 머스크의 xAI 데이터센터가 지역 주민 반발과 환경 규제에 부딪힌 것은, 대규모 배터리단지 없이 AI 거점을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이제 ESS 없는 데이터센터는 보험 없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대형 트럭과 다르지 않다.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랄 수는 있지만, 지속가능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한민국의 이차전지 산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전략적 기회를 맞고 있다. 우리가 원천 에너지원인 천연가스나 원전 설계 분야에서 모든 패권을 쥐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러나 생산된 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가공하고 유통하는 ‘에너지 물류’ 영역에서는 충분히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다. 이는 제조 경쟁력을 넘어 시스템 운영 능력으로 승부하는 영역이다.
삼성SDI와 LG에너지솔루션이 고출력·장수명 LFP 기반 ESS 제품군을 강화하며 북미 시장을 공략하는 전략은 이러한 인식에 기반한 선택이다.

▲ AI 에너지 패권의 두 축 : 기저전력 VS 조정장치.미·중 갈등으로 글로벌 공급망의 신뢰성이 핵심 경쟁력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한국산 배터리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에게 전력망 안정성을 책임지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선택지로 자리잡고 있다.
더 나아가 ESS 산업은 단순한 하드웨어 경쟁에 머물지 않는다. 배터리관리시스템(BMS), 에너지관리시스템(EMS), AI 기반 수요 예측과 제어 기술이 결합되면서, ESS는 고부가가치 소프트웨어 산업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는 한국이 단순한 배터리 제조국을 넘어, 에너지 운영 플랫폼 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전력을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정교하게 다루느냐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AI 패권 경쟁에서 전력이 화폐라면, 이차전지는 그 화폐가 원활하게 유통되도록 만드는 금융 시스템에 가깝다. 화폐가 아무리 많아도 유통 시스템이 무너지면 경제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차전지를 단순한 보조 수단이나 틈새상품이 아닌, AI 인프라의 필수 유통망으로 재정의해야 하는 이유다.
정부는 대규모 송전망 확충의 보완책으로 ESS를 국가 전략 인프라로 격상시키고, 제도적·재정적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기업 역시 배터리 성능 경쟁을 넘어, 전력 흐름을 다스리는 운영 역량을 핵심 경쟁력으로 삼아야 한다. 전력을 생산하는 자가 시대를 연다면, 그 전력을 조율하는 자가 비로소 시대를 완성할 것이다.
출처 : 에너지신문(https://www.energy-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