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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논단] 경제안보 시대, 대한민국 산업 ‘숨통’ 틔워라
송고일 : 2026-05-28
▲ 이상협 KIST 기후환경연구소장실 책임연구원 .[에너지신문] 안보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과거의 안보가 총과 칼로 국경을 지키는 물리적 방어에 국한됐다면, 오늘날의 안보인 ‘경제 안보(Economic Security)’는 국가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스스로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의 지속성’을 확보하는 전쟁이다.
이제 국가의 주권은 단순히 영토를 보존하는 것을 넘어, 외부의 어떤 방해나 공급망의 교란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생적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서 완성된다.
최근 새만금 국가산업단지에서 울려 퍼진 수소와 로보틱스의 비전은 이러한 경제 안보의 대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임석한 자리에서 현대자동차가 그려낸 청사진은 단순한 기업의 미래 전략을 넘어, 대한민국이라는 유기체가 어떻게 다시 숨 쉬고 유영할 것인가에 대한 국가적 해답을 담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대한민국을 하나의 생명체로 규정하고, 그 생존을 위한 결정적 요소들인 두뇌와 혈관, 심장과 호흡의 관계를 재설계해야 한다.
■두뇌(Brain):반도체라는 중추신경계의 선점
국가라는 유기체에서 가장 먼저 작동해야 할 곳은 ‘두뇌’다. 인공지능(AI)과 데이터가 지배하는 대전환 시대에 반도체는 단순한 산업 부품이 아니라, 국가의 지능과 국방력을 결정짓는 핵심 자산이자 중추신경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반도체라는 압도적인 필살기를 통해 세계의 두뇌를 일정 부분 장악했다. 우리가 글로벌 반도체 패권 다툼의 중심에 서 있는 이유는, 전세계 지능을 처리하는 중추신경의 핵심 노드를 우리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명민한 두뇌를 가졌더라도, 그 지능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가 실시간으로 공급되지 않는다면 유기체는 뇌사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반도체라는 두뇌가 내린 명령이 각 기관으로 전달되고, 그곳에서 실질적인 동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혈관의 통제권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혈관(Vessel):전력망, 경제적 영토를 넓히는 대동맥
우리는 이제 ‘제2의 반도체’로 전력망 기술, 특히 초고압 직류송전(HVDC)을 주목해야 한다.
AI 데이터센터의 폭발적 증가와 탄소중립을 위한 에너지전환은 전세계적인 ‘전력 쟁탈전’을 촉발했다. 반도체가 유기체의 두뇌라면, 전력망은 그 두뇌에 피를 공급하는 혈관이다.
전력망은 한 번 구축하면 수십 년간 교체가 어려운 국가기간 시설이다. 우리 기술인 ‘K-그리드’로 세계 곳곳에 에너지 혈관을 깔아준다는 것은, 해당 국가의 에너지 운영 표준과 안보 시스템 자체를 대한민국과 동기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제품 수출을 넘어 우리의 ‘경제적 영토’를 전 세계로 확장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특히 아세안(ASEAN) 10개국은 우리의 혈관 전략이 뻗어 나갈 핵심 요충지다. 파편화된 기술 표준과 노후화된 인프라로 고통받는 그들에게 우리의 HVDC 기술과 지능형 전력 관리 시스템을 이식한다면, 아세안 전체의 에너지 흐름을 관리하는 ‘에너지 운영체제(OS)’를 대한민국이 선점하게 된다.
이는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경쟁국인 일본이나 중국의 영향력을 압도하고 우리 기업들의 활동 공간을 보장하는 거대한 ‘안전지대’를 확보하는 길이다.

▲ 경제 안보(Economic Security)’는 국가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스스로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의 지속성’을 확보하는 전쟁이다.■심장(Heart):무탄소에너지(CFE), 좌심계와 우심계의 조화
튼튼한 혈관에 흐를 피를 힘차게 뿜어내는 곳은 심장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유기체를 지탱하는 심장은 ‘무탄소에너지(Carbon-Free Energy, CFE)’라는 두 개의 엔진으로 박동해야 한다.
해부학적으로 심장이 좌·우의 명확한 역할 분담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듯, 우리의 에너지 심장 역시 원자력과 신재생에너지의 조화로운 분업이 필요하다.
우선 ‘좌심계(원자력)’는 전신에 혈액을 공급하는 강력한 펌프다. 거대한 산업 단지와 24시간 멈추지 않는 반도체 라인에 일정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원자력이라는 묵직하고 안정적인 기저 전력의 압력이 필수적이다.
좌심실의 두꺼운 근육이 온몸으로 피를 뿜어내듯, 원자력은 대한민국 산업의 기초 체력을 유지하는 추동력이 된다.
반면 ‘우심계(신재생에너지)’는 에너지를 정화하고 순환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온몸을 돌고 온 피를 폐로 보내 산소를 얻게 하듯, 신재생에너지는 국가 에너지믹스에서 탄소를 걷어내고 청정함을 유지하게 한다.
글로벌 공급망이 요구하는 RE100과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라는 엄격한 기준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 에너지 체계의 탄소 농도를 끊임없이 낮춰주는 신재생에너지의 정화 기능은 유기체의 지속가능성을 결정짓는 필수 요건이다.
이 좌·우 심방과 심실이 이념의 갈등을 넘어 조화롭게 박동할 때, 비로소 청정한 에너지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갈 수 있다.
■호흡(Breath):수소(H2), 막 트인 산업의 숨통
반도체라는 두뇌가 있고, 전력망이라는 혈관이 흐르며, 무탄소에너지라는 심장이 뛰어도, 마지막 퍼즐인 ‘호흡’이 없다면 유기체는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 산업에 있어 그 호흡을 담당하는 기체가 바로 수소(H2)다. 전기에너지가 혈액처럼 실시간으로 흐르며 미세한 움직임을 담당한다면, 수소는 에너지를 분자 형태로 압축해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거대한 폭발적 힘을 내뿜게 하는 호흡과 같다.
철강, 화학, 대형 물류와 같은 우리 경제의 거대한 ‘근육’들은 전력망이라는 혈액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탄소를 뱉지 않는 청정한 수소라는 호흡이 공급될 때 비로소 대한민국 중화학 공업은 질식의 위기를 벗어나 건강한 신진대사를 시작할 수 있다.
2019년 수소경제의 열기가 한동안 잠잠했던 것은 수소가 불필요해서가 아니라, 인프라라는 ‘기도(Airway)’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현대차가 새만금에서 그려낸 수소생태계는 에너지를 직접 생산하고 활용하는 국가적 ‘폐(Lung)’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여기에 포항제철의 수소환원제철(HyREX) 공법이 결합하면, 탄소를 내뿜던 낡은 산업의 폐를 들어내고 청정수소로 숨 쉬는 새로운 장기를 이식하는 대수술이 완성된다.
우리는 이제 막 고통스러웠던 ‘무호흡 구간’을 지나, 수소라는 숨통을 틔우기 시작한 것이다.
■결론 : 대한민국 산업의 숨통을 틔우는 힘
반도체라는 영민한 두뇌, 전력망이라는 튼튼한 혈관, 무탄소에너지라는 건강한 심장, 그리고 수소라는 새로운 호흡. 이 네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대한민국은 단순한 제조 강국을 넘어 스스로 생존 가능한 경제안보 국가로 진화할 수 있다.
과거의 영토 확장이 땅에 깃발을 꽂는 일이었다면, 미래의 경제안보는 우리의 기술과 시스템이 흐르는 ‘연결의 영토’를 얼마나 넓히느냐에 달려 있다.
반도체와 전력망, 수소와 무탄소에너지를 하나의 체계로 묶는 ‘K-시스템’ 전략은 대한민국 산업의 새로운 생존 방식이자 세계 시장을 향한 확장 전략이 될 것이다.
2019년 울산에서 시작된 수소경제의 꿈이 선언이었다면, 이제 새만금에서 펼쳐지는 수소와 재생에너지 생태계는 그 꿈의 실천이다.
울산의 고래가 거대한 산업 전환의 가능성을 상징했다면, 새만금의 상괭이는 보다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미래 산업의 방향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은 이제 단순히 제품을 수출하는 나라를 넘어, 에너지와 산업 시스템 전체를 설계하고 연결하는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 새만금에서 시작된 새로운 숨결은 대한민국 산업의 ‘숨통’을 틔우는 첫 번째 호흡이 될 것이다.
출처 : 에너지신문(https://www.energy-news.co.kr/)
